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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에서.
시바타 쇼 저, '그래도 우리의 나날'을 읽고.
내가 가진 많은 것들이 그저 화려한 옷과 같다면, 그 옷을 벗게 되는 날, 나는 누구일까? 벌거벗은 몸으로 흙이 되는 날, 나는 무엇일까? 내가 부숴지고 갈아지면, 나는 과연 무슨 맛을 낼까?
죽음 앞에서 진지해지지 않는 사람은 없다. 죽음의 탄환은 단 한 번도 육체를 빗나간 적이 없다. 죽음은 궁극의 승리자다.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날만이 아니다. 우린 살아가면서도 죽음을 경험한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겐, 언젠가는 적어도 한 번 이상,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온다. 꺾이고 무너지고 부숴질 시기. 인생의 낮은 곳을 지날 때다.
이 책, 시바타 쇼의 '그래도 우리의 나날'에서, 결국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사노'라는 이름을 가진 한 남자가 문득 마주한 생각 역시 죽음 앞에 선 자신의 모습에 관해서였다. '나는 죽음을 앞두고 무엇을 생각할까?' 그리고 그는 그 질문과 동시에 번개처럼 무서운 답을 스스로 한다. '나는 배신자다!' 그 이외엔 어떠한 답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홀로 외딴 산장을 찾아가 그곳에서 과량의 수면제에 몸을 맡긴다.
이 소설의 배경은 1950년대 언저리, 제 2차 세계대전 직후다. 사노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공산당에 가입할 정도로 진보적인 혁명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메이데이 궁성 앞 광장에서 벌어졌던 시위 현장에서 경찰 진압대의 공격에 공포를 느꼈고 죽을 힘을 다해 그곳을 도망쳤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비록 대학에 진학하여 공산당의 일원으로서 역할을 이어갔지만, 사노는 무섭다는 이유만으로 동지를 배신하고, 당을 배신하고, 자신을 배신해버렸던 그때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 괴로운 정신적인 이중생활의 시작이었다. 이는 결국 수 년 후 그를 자살에 이르게 만드는 실마리가 된다.
사노 뿐만이 아니었다. 이 책의 화자 후미오의 애인, 세쓰코 역시 사노가 남긴 편지를 읽고 동일한 질문 앞에 선다. '죽음이 눈 앞에 다가왔을 때 무엇을 떠올릴까?' 다행히 그녀는, 사노와는 달리, 죽음을 택하진 않았지만, 후미오와의 결혼도 취소하고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의미를 묻고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해 새로운 곳으로 떠난다.
사노가 죽음을 상징했다면, 세쓰코는 삶을 대변하는 이미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전후 세대가 겪은 가치관의 혼란을 보여준 작품이라면, 그 혼란은 각 사람에게 다르게 다가갔으며 또 각 사람으로부터 다른 반응을 불러일으켰음을 저자는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게 아니었을까. 그러면서도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무언가 죽음이 아닌 삶,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와 희망을 끝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우린 각자의 죽음 앞에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지금 우린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처럼 무모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진 않을까. 한 번쯤은 자신을 죽음 앞에 세워두고 자신의 정체성과 의미를 묻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사노처럼 과거의 트라우마에 잡혀 현재를 저당 잡히고 미래까지 스스로 포기하는 인생이 아닌, 세쓰코처럼 '지금, 여기'에서 다시 시작하는 용기와 의지가 필요하지 않을까.
현재 내가 가진 것들은 나를 대변해주지 않는다. 진정한 나는 빈손과 맨발로 죽음 앞에 서있는 벌거벗은 모습일지도 모른다. 나는 묻는다. 나는 어떤 맛을 내는 사람일까? 인생을 살아가며 나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소화하고 체화시켰을까? 그렇게 해서 내가 맺어온 열매는 과연 어떤 맛을 낼까? 내가 흙으로 돌아가게 되면, 다른 생명에게 도움이 되는 자양분이 될 수는 있을까? 혹시 쓴 맛만 내는 건 아닐까? 유한함의 종착역인 죽음 앞에서 아직 붙들고 있는 현재의 삶을 돌아보는 일은 분명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혹시, 우리는 이미 그런 계기들을 수없이 놓쳐버리고 있는 건 아닐까?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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