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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세속성자다.
양희송 저, '세속성자'를 읽고.
'가나안 성도'에 합류한 지 반 년이 다 되어간다. 지금은 어느 특정한 제도권 교회에 등록하지 않은 채 여러 교회를 방문하며 사뭇 다른 예배 스타일을 접하기도 하고, 주일성수라는 게 무엇인지 다시 물으며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일요일을 보내기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국민학교 3학년 때부터, 그러니까 1980년대 중반부터 교회라고 불리는 잘 지어진 독립된 건물에서 거의 매주 일요일, 상당한 시간을 보내온 나로선, 또한 한때는 교회오빠였고, 성인이 된 이후엔 차세대일군이나 리더로 불렸던 젊은이였으며, 나중엔 안수집사직까지 제의 받았던 나로선, 교회를 스스로 걸어 나왔다는 것 자체가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시간만 생각해도 30년이란 세월은 교회 생활이 내 삶의 일부가 되기엔 충분했었다.
이 책에서 저자 양희송 청어람 대표는 '세속성자'라는 새로운 단어를 제시한다. 낯선 단어이지만 자크 엘륄도 오래 전 그의 책 제목으로 사용했던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의 또 다른 표현이다. 하지만 '세속성자'라는 형용모순의 의미를 이 책 제목으로 사용하면서까지 굳이 다시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거룩함의 역설을 통해 진정한 거룩함이란 무엇인가 다시 묻고 생각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세속적이란 게 무엇인지도 다시 진지하게 돌아봄으로써,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보다 더 강조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세속이라는 말과 성자라는 단어의 역설적인 대비를 통해, 비단 가나안 성도만이 아닌 제도권 교회에 출석하든 하지 않든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세상 밖이 아닌 세상 속에서 '이미'와 '아직' 사이의 중간기의 하나님나라를 살아내고자 고군분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삶의 방식을 다시 환기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부분에서 이 책은 성찰과 그것으로부터 끌어낸 예언자적인 메시지로 가득 차 있다.
지금 한국 교회는 교회 안에서 보나 밖에서 보나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이 아님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다. 목사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은 고작 신대원 몇 년 졸업한 뒤 마치 자기들이 갑자기 성도들의 영적인 아버지나 유일한 제사장으로 승격된 것처럼 (스스로 그렇게 믿으며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말하는 목사들도 허다하다!) 특권 누리기를 거듭해왔다. 무지한 교인들을 이용해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해가며 자신의 부와 명예, 혹은 성적인 욕망 같은 파렴치한 사리사욕을 채워왔다. 집권당과 언제든 결탁할 준비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이라 믿는 성경을 요리조리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해석해대며 교인과 교회를 어지럽혀왔다. 최근 몇 년간 언론을 통해 보도된 한국 교회, 특히 한국 교회 목사들의 실태는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낯이 뜨거워 도저히 끝까지 기사를 보거나 들을 수 없게 만들었다. 거룩함과 구별됨을 그렇게나 강조해놓고 그 누구보다도 세속적인 일들을 자행해온 그들이었다. 이 모두는 정말 부끄럽지만 사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한국 교회의 민낯인 것이다.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여러 각성과 변화와 개혁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여전히 실권을 잡고 있는 한국의 극우 보수세력에는 역부족이다. 한국인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함께 가야 할 공동체로서 한국 교회를 도저히 생각하지 않을 순 없지만, 그것보다 먼저 각 개인이 깨어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비롯하여 해야 할 일들과 살아내야 할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 스스로 묻고 답해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개인이 깨어날 때에야 비로소 이 책에서 말하는 세속성자의 역할이 제대로 시작될 수 있다고 믿는다. 책에서도 언급되었듯, 개신교는 신앙을 개혁했다는 의미의 개신교 (改新敎)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개인의 신앙이란 의미에서 개신교 (個信敎)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통해 사제만이 아닌 모든 사람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제사장적인 신분이라는 깨우침을 우린 다시 기억해야 한다. 매개자를 통해야만 하나님과 만날 수 있다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고 여겼던 중세의 잔재에서 과감히 벗어나야만 한다. 그래야 세속성자의 참 의미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 성도 사이를 잇는 매개자를 자처했지만 스스로 타락해버린 목사들을 통해 우리가 배워왔던 거룩함과 세속성에 대한 의미도 재정의되고 재구별되어야 한다. 교회 안과 밖을 더 이상 성과 속 내지는 거룩한 하나님나라와 타락한 세상으로 구분하는 사람은 21세기 현재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이건 참 다행이기도 하지만, 이걸 사실로써 깨닫기까지 우린 너무 많은 것들을 잃었다). 그러므로 제도권 교회 안에서 여전히 전통적인 예배 방식을 따르며 신앙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성스럽고, 나를 포함하여 제도권 교회에 소속되기를 거부하고 신 앞에서 선 단독자로서 하나님을 다시 제대로 알길 원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시기를 외로이 지나고 있는 가나안 성도들은 마치 더렵혀졌다거나 타락했다고 여기는. 이른바 성속이원론에 입각한 어처구니 없는 논리는 파기해야 마땅할 것이다. 문제는 제도권 교회를 출석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다. 교회가 유일한 희망이라는 말은 거부하기 힘들고 나도 그렇게 아직은 믿지만, 이때 교회라는 개념은 제도권 교회를 지칭하는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은 절대 간과해선 안 된다.
이 책에서 저자가 강변하듯이, 성과 속의 이분법을 넘어, 성벽 바깥의 신앙을 상상하며 담대히 바른 기독교를 실현해내고자 우리 모두는 각자 세속성자가 되길 다짐해야 할 것이다. 주일을 세속적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는 종교생활을 위한 주말 영성이 아닌, 일상을 거룩하게 살아낼 수 있는 주중 영성을 추구하고, 일과 쉼, 노동과 놀이를 제대로 포괄하면서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는 멋진 세속성자가 되자. 아니, 우린 이미 세속성자다. 이 정체성을 깨달았다면 이제 교회생활만이 아닌 일상생활에서도 그것을 살아낼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고 그렇게 살아내자. 용기를 내자. 함께 하는 공동체와 함께.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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