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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onologue

헤세에서 도스토예프스키로

가난한선비/과학자 2019. 3. 19. 02:03


**고전문학 읽기 올해 첫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었습니다. 오늘 다 읽었는데, 꼬박 일주일이 걸렸네요. 그래도 중학생 때 읽을 때보단 훨씬 더 빨리 읽었을 뿐 아니라,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난해하다고만 여겼던 작품에서 흥미진진한 재미를 느낄 수 있었고, 작품 이면에 가려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도 언뜻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작년엔 헤세를 읽어냈습니다. 올해엔 도스토예프스키입니다. '죄와 벌'을 시작으로 '백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악령', '가난한 사람들', '지하로부터의 수기' 등의 작품을 읽을 예정입니다. 대부분 작품들의 분량이 꽤 되어서 과연 제가 몇 작품이나 읽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시간에 연연하지 않고 충분히 즐기며 읽어낼 생각입니다. 감상문도 읽는 모든 작품에 대해서 남길 수 있기를 제 자신에게 기대해봅니다.**


**'죄와 벌'을 읽고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공부를 조금 했습니다. 아래 글은 헤세를 떠나 도스토예프스키로 진입하는 입구에 서서 쓴 저의 감상입니다. 더 넓어지기 위한 저의 인생 방향에 잘 부합하는 것 같습니다. '죄와 벌'의 감상문은 곧 완성해서 올릴 예정입니다.**


들어가며,


헤세는 주로 그의 작품에서 분열과 대립을 통한 자아의 발견과 성찰, 나아가 화합과 공존을 향한 자아의 변증법적인 성장과정을 다룬다. 그래서 그의 소설에는 등장인물 내면의 목소리가 주를 이룬다. 반면, '죄와 벌'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아의 성장과정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 역시 라스꼴리니꼬프라는 한 인물의 심리 변화를 탁월하게 묘사하며 내면의 목소리를 부각시키고 있지만, 그 목소리의 현상은 성찰이 아닌 갈등과 긴장으로 나타나고, 방향은 실현이나 성장이 아닌 구원을 향한다.


등장인물이 처한 환경의 역할과 그것이 사용되는 방법과 목적 또한 현저히 다르다. 헤세의 환경 묘사는 서정적인 감수성이 한층 돋보인다는 매력이 있다. 특히 시인이기도 했던 헤세의 자연 묘사는 한 편의 그림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독자의 풍부한 감성과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가 '황야의 늑대'에서 묘사했던 도시와 술집에 대한 어두운 부분조차도 '페터 카멘친트'에서 두드러졌던 자연 묘사와 대립적 이미지를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그 환경 자체로 무언가를 말하려 하진 않았다. 심지어 '유리알 유희'에서 헤세는 주인공의 내적 변화를 도드라지게 하기 위해 '카스탈리엔'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일부러 창조해내기도 했다. 헤세에게 있어 환경은 등장인물 내면의 목소리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전달하기 위한 부수적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가 처한 환경은 적나라한 현실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써 하나의 강력한 메시지였다. 실제로 이 책에 등장하는 주요 환경은 '가난'인데, 이는 단지 라스꼴리니꼬프가 가난했다는 현실이나 그가 살았던 1860년대 뻬쩨르부르그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역할만이 아닌, 주인공이 가지게 되었던 사상과 이상의 근거, 그리고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사건인 노파 살인사건의 강력한 동기로도 사용된다. 헤세와는 달리 도스토예프스키는 환경을 소설의 배경 정도로 사용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환경으로 하여금 직접 소리 없이 말하게 하여 등장인물 만큼이나 중요한 도구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헤세의 골드문트는 굳이 조각가일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의 라스꼴리니꼬프는 가난해야만 했다.


아름답고 서정적인 감수성을 동원하여 한 편의 시나 한 편의 그림 같은 이야기를 헤세의 작품에서 깊이 공감하며 읽어냈다면, 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아름다운 상상력이 아닌 끔찍한 상상력을 동원해야만 했고, 더 보고 싶고 더 듣고 싶은 마음보단 도중에 차라리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싶은 마음이 간절히 들었던 이야기를 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죄와 벌'에서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도 현저하게 글쓰기 스타일이 다른 두 작가가 공히 다가가려고 노력했던 지점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점은 내겐 아주 매력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이는 헤세를 집중적으로 읽어냈던 작년에 이어 올해엔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어내야겠다는 나의 선택을 공고히 다지는 이유가 되었다. 헤세를 통해 한 개인의 성장을 목도하며 공감할 수 있었다면, 도스토예프스키를 통해서는 비로소 처절한 현실에 발을 내딛게 되는 것이다. 헤세에서 도스토예프스키로의 이동을 통해 나는 더 큰 타자와의 관계 속으로 내던져지는 것이다. 성찰을 통한 성장에서 갈등을 통한 구원을 향하여.


**사진은 위키페디아에서 쌔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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