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올가미.
주위에 생각이 비슷하고 마음이 통하고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축복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 역시 올가미가 될 수도 있다. 이를 자꾸만 놓치는 이유는 우리 인간은 자기중심성과 우매함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다양성을 존중하자 해놓고 막상 자신과 의견이 다른 개인이나 집단을 만났을 때 뚜껑 열리며 (여기까진 자연스런 감정이니 오케이), 미개한 상대 대하듯 계몽부터 하려는 태도, 그리고 그들을 만난 사례를 희화화시켜서 자기와 말 통하는 지인들에게 그 상대를 돌림빵시키는 행동은 모순일 수밖에 없다. 혐오와 배제를 멀리하자는 작자들이 자신들의 영역 안에서는 은밀하게 동일한 짓거리를 한다는 것은 위선일 뿐이고, 그들이 부르짖는 구호는 편가르기의 다른 방편일 뿐이다. 반동적인 세력이 갖는 힘은 이분법의 반대편일 뿐이다.
뭔가를 알고 깨닫는다고 해서 우월해진다고 생각한다면 큰 실수다. 인간 중에 우월한 인간, 열등한 인간이 어디 있는가. 그러나 우리들 가운데엔 이런 생각에 부지 중에 함몰되어 있는 자들이 적지 않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말은 여기서도 통한다.
앎과 깨달음이 정죄와 비난의 도구로 쓰이고 만다면, 차라리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함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모든 앎과 깨달음은 공짜가 아니다. 그래서 귀하다. 그러나 모든 앎과 깨달음은 또한 공적인 책임감이 부여된다. 그래서 더욱 귀한 것이다. 비난과 정죄의 중심에는 남을 나보다 낮게 깔보는 우월감과 자기중심성이 깔려있다. 자기중심성에 충만한 자가 외치는 다양성 존중과 혐오배제 타파는 과연 무슨 힘을 지니는 걸까? 결국 자신들의 의견에 맞추라는 강요를 보기 좋게 고급진 말로 포장한 말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머리만 강타한 깨달음과 공감은 자신의 영역 내에서만 유효하고, 그런 것들은 자기 합리화와 자기 위안을 대변할 뿐이다.
섬길 줄 모르는 지식인은 상대를 계몽 대상자로 보고 그들의 무지와 무식과 고집을 탓한다. 화만 내지 않아도 그들을 위해 뭔가 대단한 자선이나 사랑이라도 베푼 것처럼 생각한다. 사랑은 없다. 오로지 말도 안 된다는, 소위 ‘합리적인’ 생각 뿐이다. 그런데 그거 아는가? 당신도 합리적이지 않을 때가 부지기수이고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대체로 비논리적이라는 사실을? 어느 한 측면만 부각시켜서 말도 안 된다고 상대를 단일화시키고 악마화시키는 행위를 하는 것 역시 비논리적인 행동 아닌가. 그 이면에는 이기고 싶은 욕망, 자신의 예전 상처가 건드러진 것에 대한 반발심과 복수심과 화풀이가 숨어 있을 뿐. 결코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아무런 잡음이 없고 생각이 모두 같다고 느껴지는 순간. 어쩌면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함께 탄 배 전체가 조용히 전복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름이 존재함을 감사하자. 언제나 관건은 다름은 제거하는 게 아니라 함께 공존하는 것이다.
'in monologue'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보석 (0) | 2019.07.23 |
|---|---|
| 만연한 위선 (0) | 2019.07.23 |
| 상대성이론 (0) | 2019.07.23 |
| 헤세에서 도스토예프스키로 (0) | 2019.03.19 |
| 밥맛 (0) | 2019.03.19 |
- Total
- Today
- Yesterda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