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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onologue

보석

가난한선비/과학자 2019. 7. 23. 07:45

보석.

치열한 삶, 자신의 선택이 포함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쫓기는 삶, 쉼이 없는 삶. 매일 이런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도 언젠가는 걸려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바로 건강의 적신호가 켜졌을 때, 그리고 아무런 (혹은 변변찮은) 결과를 지속적으로 얻지 못했을 때입니다. 이 두 가지에 직면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절대 멈추지 않습니다.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지요. 이런저런 핑계와 합리화를 해대면서요. 그들은 합리화의 명수이기도 하거든요.

“나 이만큼 많이 일해서 이만큼 결과를 냈어!” 하며 정말 쉬고 싶다는 그들의 가식적인 하소연을 저도 하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괜히 멋져 보이잖아요. 대단해 보이구요. 하지만 그들에게 쉴 수 있는 기회를 주면 그것만큼 그들에게 있어서 치욕스러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그런 삶을 누구보다도 그 어느 것보다도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그 삶이 자신에게 생기를 불어넣어주며 유지시켜주는 신이거든요. 늘 벗어나고 싶다고 어린애처럼 투덜대면서도 그 투덜거림의 뿌리를 살펴보면 교만함과 거만함, 그리고 우월감으로 흠뻑 젖어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곤 겸양 떨며 말하지요. 마치 자기는 일하지 않고 싶은데, 일이 워낙 잘 되어서 안할 수가 없는 것처럼. 그래도 눈치가 조금은 있나 봅니다. 작전을 바꾼 거죠. ‘능력 최고’가 아닌 ‘운 최고’로 자신을 포장하려는 시도를 한 셈이니까요. 그러나 그런다고 달라지나요. 자기만으로 가득 차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요.

반대로, 여유 있는 삶, 가족과 저녁이 있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럼 언제나 만족감으로 충만할까요? 재미있게도 제가 알기론, 그들은 보통 마음 한 켠에는 치열하게 살지 못함에 대한 알 수 없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 치열한 삶을 경험한 사람은 물론 그런 삶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치열함이 삶을 황폐하게 하고 고갈시켜 결국 모든 것을 앗아간다는 사실을 이성적으로 알고 있음에도, 그런 삶을 마치 동경이라도 하는 것처럼 여기는 게 참 아이러니하지요. 여유는 여유가 아닌 나태함이나 게으름이 되고,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은 많으나 그렇지 않을 때보다 갈등은 더 커지는 것만 같고, 저녁엔 자신의 초라함에 자조하는 시간이 많아지게 됩니다. 여유 있는 삶은 그저 남들의 세밀하지 못하고 사려깊지 못한 시선에 의해 정의될 뿐인 허울이지요.

재미있지 않나요? 양 극단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를 동경하면서도 피하는 현상. 우리 인간이 가진 숙명일까요? 한계일까요? 도대체 행복과 만족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어쩌면 단순한 결론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치열하게 살든 여유 있게 살든 그것이 그리 행복과 만족에 핵심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입장이지요. 그래서 서로를 비난하거나 고치려고 하지 말고, 사이좋게 도우며 사랑하며 살아가자는 입장으로 기분 좋게 결론을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아무런 답도 주지 않는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덮어놓고 서로를 존중하자는 방식은 언제나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면 공동체를 붕괴시킬 수 있는 치명적인 위험요소가 되지요. 서로에 대한 이성적인 이해 없이 가지게 되는 평화는 언제나 한 순간에 불과하고 표면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갈등과 문제가 우리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인생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린 다시 원점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갈등이 전제되고 예정된 상황을 기본으로 설정해야 하는 것이지요. 물리학 문제에서처럼 언제나 1기압에 마찰도 없고 바람도 불지 않는 진공 속에서 인간사가 진행되지 않으니까요. 결국 갈등을 어떻게 마주하고 해결 또는 전환하는지가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게 되는 것입니다. 평화는 세상을 진공 속처럼 만드는 데에 있지 않고 갈등과 문제가 다반사인 현실에서 이뤄내야 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사랑의 실천 없이는 평화는 불가능합니다. 자신과 이해관계가 일치하거나 입장이 같은 사람들하고만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것은 배제와 혐오에 기반한, 반쪽짜리 평화임이 확실합니다. 세상이 진공이 아님에도 진공인 것처럼 여기며 살겠다는 의지의 발현이지요. 갈등과 문제가 버젓이 있는데, 어찌 그것을 못 본 체 하거나 배제하고 비난하면서 평화를 추구할 수 있겠느냔 말입니다.

성공회 예배를 참석하면서 평화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계몽시킨다거나 설득하여 자신과 같은 입장을 가지도록 만드는 게 평화의 유일한 수단이 아닐 뿐더러 오히려 더 큰 분쟁의 이유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내가 옳다는 생각, 남이 틀리다는 생각, 과연 우리 마음엔 사랑이 있을까요? 사랑에 기반한 평화는 분명 논리와 이성을 넘어서는 가치일 거라 믿습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논리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입장의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다룰 수 있는지가 아주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건 논리와 이성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합니다. 결국 자신의 논리와 이성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인간관계가, 아니 우리 인간 자체가 논리와 이성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신비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쩌면 논리와 이성이라고 하는 가치에는 자신의 개인적인 상처가 배여있을 수도 있습니다. 객관적이라 여겼던 것들이 알고보면 굉장히 이기적이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깨닫게 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입장이 다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가는 상황이 없다면, 우린 얼마나 더 치우쳐질까 생각해보면 그들이 한편으론 참 밉지만 참 고맙기도 한 존재이지요. 공동체란 어쩔 수 없는 다양성을 가질 수밖에 없잖아요. 함께 간다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사랑과 평화는 그런 상황에서만 빛을 발하는 보석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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