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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함.
어릴 적엔 나이가 들면 연륜이 쌓이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한층 여유로워질 것 같았다. 아등바등대며 사는 삶에서 벗어나,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커피잔을 들고 느긋한 눈으로 세상의 아침을 함께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어느새 마흔을 넘기고도 세 번째 해가 시작되었고, 벌써 보름이 지났다. 이상하게도 이삼십대 때보다 하루가 더 짧게 느껴진다. 해야만 할 것들은 여전히 산적되어있다. 난 여전히 시간이 모자라다. 과연 나는 나이를 먹고있는 걸까, 아니면 나이 먹는다고해서 여유로워질 거라는 생각이 그저 허상이었던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모든 게 그대로이지만 시대가 바뀐 탓일까. 아마 답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똑같이 시간이 모자라지만, 산적된 일들의 목록을 보니 많이 바뀌었다. 어쩌면 이게 유일한 차이점일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는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 것처럼, 마치 모든 걸 초월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공부와 연구에 매달렸었다. 젊음의 패기라고 불러야 할까. 대신 그걸 더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운동과 신앙을 포함한 모든 일들이 제물로 받쳐졌었다. 그건 곧 성공과 출세라고 불리는 고지를 탈환하기 위한, 가방끈 긴 자들의 삶의 방식이었다. 나는 참 열심히도 달렸던 것 같다.
젊었을 때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 우물만을 쉬지 않고 파대는 치열함을 경험해보는 것은 그다지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그렇게 함으로써 얻은 것들도 많다. 그 과정 중에도 거친 협곡과 험한 광야가 있었다. 인내하고 인내해야만 하는 지난한 시기도 있었다. 포기하고 싶은 생각들과도 무수히 싸워야만 했다. 그리고 나는 살아남았다.
그런데 세상에 나와보니 나처럼 살아남은 자 (그러니까 이 컨텍스트에서는 나의 박사학위 취득과 좋은 논문 출판을 얘기한다)에게 허락된 건 넓은 길이 아닌 더욱 좁은 길이었다. 내 손엔 생물학 박사학위와 누적된 지식과 숙련된 기술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고, 다른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그제서야 나는 내가 손에 쥐려고 했던 것만을 마치 숭배하기라도 하듯 생각하며 좇아왔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꼭 잡기 위해 내가 놓쳐버린, 때론 내가 일부러 버려버린, 무수히 많은 것들을 아까워하기 시작했다.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믿었던, 그래서 다른 것들을 다 포기해도 괜찮다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위해 나는 또 다른 십 년이 필요했나보다. 그리고 나는 2020년을 맞이했다. 마흔 세 살의 나이가 되었다. 열 한살 되는 아이의 아빠이자 박사 후 10년을 넘긴, 예전엔 그저 지나가는 과정이라 여겼던 박사후연구원 (이젠 이 위치에도 등급이 매겨져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허나, 본질적으론 다 똑같다) 자리를 직업으로 가지고 있는 일개 과학자다.
누구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박사학위를 가지고서 신세한탄을 하기에는 너무한 거 아니냐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역시 예전의 나처럼 박사나 의사나 변호사 같은 ‘~사’자 돌림의 직업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는 것이다. 먹고 살기 힘든 건 소수의 극빈층나 소수의 극부층 빼고는 다 고만고만하다.
책은 여전히 많이 읽고 싶다. 언제 또 이렇게 읽어보겠냐는 생각에 더 그렇게 된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에 대한 소중함이 예전보다 더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내 키는 그대로인데, 아이의 키는 한 달이 멀다하고 계속 자란다. 몸무게도 늘고 뼈대도 커져서 이젠 번쩍 들어올리기엔 조금 무리가 있다. 품에 안아도 예전과는 다른 느낌이다. 그래도 아직 아빠가 안아주는 걸 좋아하고 아빠랑 노는 걸 좋아하니 참 다행이라 생각한다. 이 시기도 금새 지나가버릴 것이다. 지금 함께 할 때 더욱 함께 함을 사실적으로 알아채며 누릴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책 한 권 더 읽는 것보다 더 소중한 시간이리라 믿는다. 이것이 이마도 허전한 빈공간을 채우려는 헛된 시도가 아닌, 내가 채우고 있는 작은 시공간을 아름답게 만들며 거기에서 깊고 풍성한 기억들을 만들어내는 일일 것이다.
내일은 아들의 생일. 엄마가 잠시 한국에 있어서 아쉬운 마음이 앞서지만, 아빠인 나에게 함께 하며 소중하고 행복한 날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니 이 기회를 허투루 날려버리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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