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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_’한나 아렌트, 전체주의를 넘어 정치의 길을 보다’를 읽고
진리가 아닌 의견: 정치 회복의 중요성
내가 아는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으로부터 ‘악의 평범성’ 개념을 도출한 사람이라는 것, 하이데거와 연인 사이였다는 것, 그리고 정치철학자였다는 것 정도였다. 모두 어디에서 주워들은 것들이다. 한 사람을 띄엄띄엄 보면, 혹은 조각조각만 알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왜곡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 이 챕터를 읽으면서 다시 한번 깨달았다.
악의 평범성은 여러 번 곱씹어 보기도 하고 다양한 맥락에 적용하기도 하면서 얼추 ‘사유의 불능’ 혹은 '무사유'라는 핵심을 이해한 것 같긴 하다. 자신의 테두리 안에서 호위호식하며 사는 사람들의 공통점 역시 무사유로 소급할 수 있다는 것도 나는 충분히 추론할 수 있었다. 악은 특별히 나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는 특별한 행위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 없는 행위들이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도 깊이 공감했었다. 뿐만 아니다. 이런 사유에 공감이 되고 동의가 된다고 해서 다가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이 무사유의 사람인지 성찰하는 실천의 단계로 나아가야 하고, 그 실천을 통해 사유하는 인간으로, 즉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묻고, 객관성을 보유한 상황으로 스스로를 위치시킨 뒤, 가만히 있으면 저지르게 되는 악의 평범성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벗어나려는 애를 써야 한다는 것까지도 나는 삶에서 체득해 가는 중이다. 나는 철학한다는 것은 머릿속으로 사유하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삶의 실천으로까지 나아가야 하는 거라고 믿는다.
아렌트가 하이데거와 연인 사이였다는 건 과장된 사실이었다. 그녀는 하이데거와 1년 정도만 사귀었을 뿐이고 먼저 떠난 쪽도 아렌트였다. 결별한 정확한 이유는 그 누구도 모르겠지만, 이 책에 따르면 사상의 차이였다고 한다. 하이데거가 죽음을 중심으로 존재를 사유한 반면 아렌트는 탄생성을 중심으로 했다고 한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죽음을 존재론적 불안의 근본원인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 불안 앞에서 도망치지 말고 두 팔 벌려 끌어안게 되면 경이와 함께 존재가 말을 걸어오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는 하이데거의 철학은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하지만 아렌트는 인간이란 존재자는 무엇인가를 처음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이 능력으로 뭔가를 새로 만들어 가면서 거미줄처럼 복잡한 인간 관계망을 만들어간다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고 한다. 하이데거와 달리 아렌트는 개인의 깨달음, 그러니까 불안에서 경이로 넘어가며 존재로부터 소외되지 않도록 하는 데에 치중하지 않고, 수많은 새로운 일들로 인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새로운 인간관계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비로소 정치적 행위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이데거에게서는 배울 수 없던 것이었다.
뿐만 아니다. 나는 정치철학이라는 용어를 누누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이 책에 따르면 정치와 철학은 형용모순 같은 것이라 한다. 철학은 어떤 하나의 진리를 담보하는 반면 정치는 다양한 의견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렌트 역시 자신을 소개할 때 정치철학자라는 용어 대신 정치 사상가 내지는 정치 논평가라고 소개했다고 한다. 아렌트는 진리가 아니라 의견이 정치의 중심이라는 것을 다시 환기시키며 진리 주장이 정치 영역을 파괴할 수 있다는 경고도 내렸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서 '정치의 회복'까지 그녀의 사상이 이어진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조건을 회복하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정치적 행위라는 것. 아렌트의 중심 사상이었다고 한다. 이런 것들은 그녀의 머릿속에서만 나온 게 아니었다. 직접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며 보고 느꼈던 전체주의에 대한 이해에 비롯된 통찰이었다. 전쟁을 겪으며 인간의 이성 중심주의에 대한 회의와 환멸은 정말 많은 철학자와 신학자, 그리고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다.
이렇게 스무 페이지 정도로 아렌트의 사상을 이해하기는 역부족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 전후로 해서 아렌트가 어떤 행보를 보였는지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그에 따른 그녀의 사상의 발전을 훑어보니 내가 알던 한나 아렌트가 조금 더 정확해진 것 같다. 역시 공부는 정확해야 한다. 직접 확인해야 한다. 그러지 못한 공부는 공부의 정반대 효과를 내는 지름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책장에 예전에 사둔 '한나 아렌트와 차 한 잔'이란 책이 보인다. 저자 이름을 보니 이 챕터를 쓴 김선욱 교수다. 잘 됐다 싶다. 한나 아렌트의 사상을 훑어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 읽기
1. 노동의 존재론과 칼 맑스의 혁명 사상: https://rtmodel.tistory.com/2092
2.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무의식 혁명: https://rtmodel.tistory.com/2102
3. 프리드리히 니체가 제시한 미래철학의 서곡, 관계론: https://rtmodel.tistory.com/2111
4. 현상학의 창시자, 후설: https://rtmodel.tistory.com/2121
5. 로자 룩셈부르크와 혁명의 변증법: https://rtmodel.tistory.com/2131
6.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https://rtmodel.tistory.com/2143
7.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 몰락 이후의 아우라: https://rtmodel.tistory.com/2157
9. 부정당하면서도 전진하는 사유의 찬란함, 테오도르 아도르노: https://rtmodel.tistory.com/2168
10.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를 넘어 정치의 길을 보다: https://rtmodel.tistory.com/2179
#동녘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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