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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소수 이민자의 애환을 담아내다.

황숙진 저,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읽고.

비록 소설이라는 허구의 형식을 따르고는 있으나, 이 책은 미국 엘에이 한인들의 (나아가 모든 소수자의) 현실적인 삶의 애환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때로는 소설이 신문보다 현실을 더 잘 반영하는 법이다. 무작위적이고 변화무쌍한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들이 기록되는 신문은 기사 거리가 될만한 것들을 자본주의 경제논리에 따라 취사 선택하여 기록한다. 그래서 그 사건/사고들에 관련된 사람들만이 마치 영화 속 주인공처럼 그 시대의 흐름을 좌지우지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하지만 현실의 거대한 수레를 돌리고 있는 실제 주인공들은 대통령도, 정치가도, 사장들도, 혹은 범죄자들도 아닌, 바로 서민들이다. 이름도 빛도 없이 그늘에서 살아가는 서민들. 그 중에서도 머나먼 타국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는 서민들의 일상이 짙게 녹아 든 이 책과 같은 소설은 사람들의 주목에서 벗어나 있지만 우리네 삶의 현주소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소설이지만, 그래서 허구이지만, 자본이 만든 무대 밖에 있던, 현실세계의 주인공을 실제 삶의 주인공 자리로 불러내어 그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이 작품은 그래서 더욱 현실 아닌 현실인 것이다.

각 작품에 등장하는 구체적인 지명과 가게나 길 이름은 자칫 독자로 하여금 이 책이 소설이 아닌 저자의 회고록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그만큼 작가 황숙진의 실제 경험이 보이지 않게 묻어 각 작품에 흔적처럼 남아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흔적들은 이 책에 실린 아홉 편의 단편소설의 뼈대가 되었다. 허구도 너무 허구적이면 허구의 기능을 상실한다. 독자가 잠시 혼란을 일으킬 정도로 삶의 현실감이 긴장감과 함께 부여될 때 그제서야 허구는 허구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을 읽는 독자는 LA 타임즈와 같은 신문에서보다 LA의 삶을 더 사실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홉 편의 작품에 (다는 아니지만)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키워드는 소수자, 이혼, 돈, 불안과 두려움, 슬픔과 그리움 등이다. 피라미드 시스템의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돈이 곧 정의이고 이기는 것이 정의일 때가 부지기수다. 언제나 피해는 피라미드 저변을 받치고 있는 서민들, 그 중에서도 신분과 인종, 경제적 차별을 받는 소수자들의 몫이다. 세계에서 가장 부자인 미국이란 나라의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인 엘에이 다운타운에는 홈리스들이 넘쳐나며 미국 내 범죄율이 높은 지역 중 하나다. 한인타운은 바로 그 다운타운 옆에 위치한다. 이민 1세대와 2세대들의 삶의 터전이 된 그곳은 한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이 공감할 수 없는 애환이 있다. 말로 하기도 어렵고 기사로 쓰기도 어려운 그들의 애환이 궁금하다면, 난 이 책을 주저 없이 권하고 싶다.

다음은 아홉 편의 각 작품을 간단히 요약하며 감상을 조금씩 덧붙인 글이다. 책을 선물해 주신 저자 황숙진 님에게 감사를 드린다.

미국인 거지
첫 작품으로 수록된 '미국인 거지'는 엘에이 한인타운에 거주하는 한 중년남성의 애환을 그려내고 있다. 참고로, 이 작품은 2008년 재외동포문학상 소설 부문에서 입상작으로 선정되었다. 주인공 '나'는 십 년이 넘도록 가게를 운영하며 악착같이 살아왔다. 그러나 아내는 유방암으로 죽었다. 딸도 집을 떠났다. '나'는 알코올 중독자다. 젊었을 적 한국에 있을 때엔 해병대에 자원하여 월남 전에도 참전했었다. 돈 때문이었다. 운이 좋아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하지만 '나'는 그 이후로 전쟁 후유증에 시달린다. 삶이 힘들어 자살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냉장고에 붙어 있던 알코올 중독 재활센터 연락처가 눈에 들어왔다. 운명인가 싶었다. 손목을 그으려던 식칼을 내려놓고 전화를 걸어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일자리도 구했다. 흑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갱단들끼리의 총격전도 자주 벌어지는 우범지대에 위치한 리커스토어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더 이상 잃을 게 없었다. 그리고 가게 앞에 늘 서있는 흑인 거지 '잭'과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그는 다른 거지들과는 달리 구걸하지도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한때 부자였으나 교통사고를 당한 후 마약에 손을 댔다고 했다. 그리고 그 역시 월남전 참전 후 전쟁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나'는 잭에게서 묘한 공감대를 느낀다. 어느 날 갱단의 총격전 때문에 잭이 머리에 총을 맞아 구급차에 실려간다. 그 때문일까. '나'는 일 년 만에 다시 술을 마신다. 그리고 잭의 발작은 '나'의 발작으로 전가되었다. 술에 취한 '나'는 다시 월남 전의 '나'로 돌아간다. 함께 일하는 씨씨를 위협하다가 눈을 감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총에 맞은 건 씨씨였을까, '나'였을까. 싸이렌 소리가 나고 경찰이 구급침대를 들고 와 결박하여 구급차에 싣는 건 '나'였다.

산타모니카의 기러기
이 작품에서 저자는 김숙희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다. 그녀는 한국에서 결혼 후 잘 나가는 남편의 조용한 외도로 반강제적이면서도 반자발적인 미국행을 택했다. 표면상의 이유는 딸아이의 교육이었다. 한국적인 삶의 습관을 벗어나는 게 어려워 선택한 곳이 엘에이 한인타운이었다. 직업도 없이 남편이 한국에서 보내주는 적은 돈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비자 문제와 운전면허증 때문에 영어학원에 등록해놓고 간신히 불법체류를 면하고 있었다. 남아도는 시간이 무료하여 한국의 시조를 배우는 시조토방에 취미로 참석했다. 그 모임에서 만난 강사 강석진은 그녀에게 남자로서 접근을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비록 어린 딸아이도 금새 파악할 정도로, 그리고 외도하는 남편에게 직접 따지거나 화도 못 낼 정도로 바보 같고 불행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자신까지도 그럴 수는 없었나 보다. 그러나 어느 날, 딸아이의 학교폭력사건이 터졌던 날, 그녀는 미칠 것 같은 감정에 홀로 산타모니카 피어를 찾는다. 자살 생각까지도 할 때 즈음, 그녀는 서쪽 하늘로 날아가는 기러기떼를 본다. 언젠가 시조토방에서 배운 이옥봉 시인의 시조에 등장했던 그 기러기였다. 그리고 그녀는 강석진에게 편지를 쓴다. 인생이 슬프고 힘겹지만 마음을 굳게 먹겠다는 다짐을, 그리고 다시 그를 만나 한시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내가 달리기 시작한 이유
이번에 작가는 초등학생인 둘째 딸이 된다. 사람이 좋아 사업에서 망한 뒤 집에만 틀어박혀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아빠, 덕분에 생계가 어려워져 직접 일자리를 찾아나선 엄마, 그리고 철이 덜 든 사춘기 고등학생 언니와 함께 살아가는 아이다. 이름은 체리, 그녀에게는 단짝인 알리사라는 두 살 어린 친구가 있다. 약물과다로 생을 마감한 엄마를 뒤로 하고 할머니와 꿋꿋하게 살아가는 작은 아이다. 알리사 엄마의 죽음은 체리가 처음 목격한 죽음의 실체였다. 이 작품의 저변엔 죽음이 잔잔히 흐른다. 하지만 생각이 깊은 초등학생 체리의 눈으로 본 삶은 그리 어둡지만은 않다. 비록 작품의 끝부분에서 아빠가 한국으로 홀로 떠나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 상황을 맞이했지만 말이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슬픔 속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고 살아남으려는 저자의 애환이 어린아이의 눈을 통해 정제되고 절제되어 잘 그려져 있다. 체리가 달리기 시작한 이유는 울지 않기 위해서다. 멀리 떨어져있거나 설사 죽은 이라 할지라도 누군가가 뛰고 있는 자신을 뒤에서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눈물도 흘리지 않아야 했고 씩씩해야 했기 때문이다.

모네타
주인공 영진은 어느 날 밤 전화를 한 통 받는다. 오래 전 연락을 끊었던 친구 선우였다. 둘은 함께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함께 예일대에 입학했다. 서로 주류사회에 들어가자고 화이팅을 했었다. 예일대 입학은 집안의 자랑거리였다. 특히 아버지가 동네방네 자랑을 하실 만큼. 그러나 김치 냄새가 나는 영어실력으로는 미국 주류 사회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영진은 졸업 후 꿈을 갖고 해오던 카피라이터 일에서 실패함으로써 선우보다 먼저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선우에게 말하지 않고 엘에이로 돌아왔다. 가족까지 데리고 돌아온 그를 아버지는 수치스럽게 생각하셨고, 할아버지 건강 문제로 한국에 가신 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한편 선우는 월스트리트에서도 어마어마한 연봉을 받으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밤 마치 자살 직전 마지막 인사라도 하는 것 같은 뉘앙스로 전화가 문득 걸려온 것이었다. 영진은 위급함을 느끼고 곧장 뉴욕으로 날아갔다. 경찰에 신고를 했지만 그가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선우가 다니던 회사 부사장이 전화해서 만나자고 했다. 그런데 뜻밖의 말을 하는 것이었다. 선우는 마이애미애서 실종되었다고. 그리고 그 이전에 돈을 횡령하여 도망쳤다고. 영진은 허탈했다. 선우가 자살했다는 정황이 그랬고, 자신이 한 발 늦었다는 사실이 그랬으며, 선우가 범죄까지 저질렀다는 사실이 그랬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는 공항에서 영진은 선우를 우연히 본다. 선우는 카멜레온처럼 위장하여 숨어 살고 있었던 것이고 영진은 이용 당한 셈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모네타, 즉 돈 때문이었다.

어느 장거리 운전자의 외로움
운 좋게 명문대를 졸업한 한국 여성과 결혼을 한 후 시애틀에서 조그만 마켓을 운영하며 아내의 공부를 뒷바라지하던 주인공은 어느 날 아내로부터 갑작스런 이별 통보를 받는다. 그녀는 주인공이 그녀의 명의로 돌렸던 집마저 팔아 버리고 그 돈을 다 챙겨서 얼굴 한 번 비추지도 않고 달랑 쪽지만을 남겨둔 채 떠나버린 것이었다. 배신감과 분노에 휩싸여 뉴욕에 산다는 그녀를 찾아가 죽이려고도 시도했었지만, 이미 그는 그녀에게 접근금지명령이 내려져 있었기에 경찰에 체포되어 두 달이 넘게 감옥을 다녀올 수밖에 없었다. 허망한 마음에 가게를 누나에게 넘기고 엘에이로 내려와 십 년이 넘도록 노가다를 하며 생계를 유지해가고 있는 그였다. 어느 날 신문광고에서 "장거리 운전하실 분. 시민권자 환영"이라는 기사에 눈이 간다. 그는 엘에이도 벗어나고 싶었고 노가다도 때려 치우고 싶었다. 모든 것이 지긋지긋했다. 전화를 걸어 구인광고를 낸 자를 직접 만나보니 그가 맡을 임무는 한국에서 건너온 밀입국자들을 캐나다 밴쿠버를 경유해 미국까지 불법으로 실어다 주는 일이었다. 한 사람 당 천 달러, 7인승 밴에 사람이 꽉 차면 한 달에 두 번만 해도 노가다 몇 달치를 한 번에 벌 수 있는 큰 돈이었다. 범죄에 가담하는 사실이 꺼림칙했으나 그에겐 돈의 유혹이 너무 컸다. 그래서 그는 마치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밀입국하는 걸 도와주는 '코요테'처럼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몰래 사람들을 날라주는 코요테가 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그의 첫 임무는 마지막 임무가 되어버린다. 밀입국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창녀라고 불리는 한국여성들이었다. 인신매매와도 같은 범죄였다. 그들은 돈이 필요해 그런 극단의 선택을 했던 것이다. 모두 미국으로 입국시켜 룸살롱이나 마사지샵에 일하도록 계획되어 결국은 성매매에 이용되는 운명들이었던 것이다. 첫 임무가 시작되기도 전, 함께 일하게 된 이 부장의 지나친 변태 행위를 목격하곤 도저히 그를 가만 놔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약에 취한 그를 때리고 결박한 후 여자들만을 데리고 미국으로 밀입국 한다. 여자들에게 자유의 몸을 허락해주는 동시에 그는 그 일에서 손을 떼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여자들 가운데 수지라는 여자만은 자유를 받아들이지 않고 원래 계획된 라스베가스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다. 빚진 돈이 있고 자신을 의지하고 있는 사람들을 등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못해 그는 수지의 부탁을 들어주느라 라스베가스로 향하고, 거기서 돈을 도박으로 다 잃고, 수지와 작별을 한 후 쓸쓸히 엘에이로 돌아온다.

죽음에 이르는 경기
이 작품의 시대는 미래다. 자본주의의 몰락을 코 앞에 둔 시점이다. 화자인 '나'는 기자다. 최근 사회부에서 경제부로 전속되었다. '나'는 자본주의를 찬양하고 밝은 미래를 자부하는 대부분의 학자들보다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그것의 몰락을 예견한 학자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다. 어느 날, 숙직하고 있는 새벽, 전화가 한 통 걸려온다. 어떤 여자였다. 콜로세움이라는 레저와 주거 복합의 새로운 콘도미니엄에 있는 K2 선수들의 식당에서 일하고 있는 직원이었다. 그녀는 대뜸 그곳에서 은밀하게 살인이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마침 '나'는 아담 스미스 300주년을 맞이하여 특집 기사를 쓸 계획을 하고 있던 차였다. 콜로세움 건립 등으로 갑부가 된 Lifjoy44와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 자본주의가 본인이 생각해왔던 것처럼 그렇게 비관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믿게 되기도 한다. 이어서 그는 자본주의를 낙관하는 프랭클린 교수와의 인터뷰, 그 반대를 예견하고 있으며 지금은 은퇴 후 엘에이 근교 시골에서 소박하게 살아가고 있는 주쩌라이 교수와의 인터뷰도 끝냈다. Lifjoy44와의 인터뷰 때 선물로 받은 콜로세움 평생 회원권을 사용하러 간 날 밤, 전화 속 그 여자가 찾아와 자신이 일하는 선수 식당으로 그를 데려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K2 경기에서 패배한 스모크 킹의 시체를 직원들이 들고 와 토막을 내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찍고 숨을 죽이고 있는 찰나, 전화벨이 울렸다. 무음처리를 깜빡 했던 것이다. 스마트폰을 여자에게 넘기고 '나'는 달려나가다가 붙잡힌다. 정신을 차려보니 Lifjoy44가 눈 앞에 있고 권총을 들고 있다. 바로 그때 TV에서는 '나'가 찍은 동영상이 그 여자에 의해 배포된 탓인지 무장경찰들이 콜로세움으로 들이닥치는 모습이 보인다. Lifjoy44의 총구는 결국 '나'가 아닌 자신의 머리가 되었다. 그리고 2038년 여름, 금리 0%를 기록하며 사실상의 자본주의, 즉 죽음에 이르는 경기는 종식된다.

호세 산체스의 운수 좋은 날
이 작품의 주인공은 한국인이 아닌 멕시코인이다. 그는 불법으로 미국에 건너왔다.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엘에이에는 한국인만이 소수자가 아니다. 히스패닉이 수로는 한국인보다 많을지 몰라도 그들 대부분의 경제사정은 한국인들의 그것보다 못하다. 실제로 가게에서 단순노동을 맡고 있는 층은 그들이다. 한국인은 백인들에게는 열등감을 느끼면서도 은연 중에 히스패닉이나 흑인들에게는 우월감을 느낀다. 이 작품에서도 한인타운은 주인공 호세에게는 천국과도 같은 곳으로 느껴진다. 미국에 온 지 이틀 만에 몇 십 달러 (멕시코에서는 적어도 한 달은 일해야 벌 수 있는 돈)를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틀 만에 그는 기습 단속을 나온 마약 단속반에게 마리오 일당과 함께 억울하게 체포되었고, 그의 밀입국 사실이 조사과정에서 밝혀져 멕시코로 추방되었다. 마치 실제 기록을 쓴 것처럼 구성된 이 작품 역시 소수자의 애환을 절절히 담아내고 있다. 소수자란 인종과 국가를 뛰어넘는 개념인 것이다. 주인공 호세의 미국에서의 이틀은 운수 좋은 날이자 경찰에게 체포된 날이다.

거칠어진 손
주인공 '나'는 하얀 손을 가진 대학생이다. 집안 사정이 힘들어 스스로 대학을 휴학하고 아버지가 몇 십 년간 했던 노가다를 시작했다. 몇 달 만에 그의 손은 여느 노가다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손으로 변해갔다. 그는 익숙해지는 일에서 만족감도 느꼈지만, 동시에 공부와는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 두렵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말도 안 되는 양의 고된 일을 맡게 된 '나'는 늘 함께 일을 하던 최 선생님도 불평하며 돌아가버린 후 혼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처리해버린다. 그 하루 동안 '나'는 생각이 정리되면서 내면의 전투를 드디어 끝낸다. 사막에서도 살아남는 강인한 전사가 되기로 마음을 굳게 먹게 된 것이었다. 하얀 손은 자신에게 더 이상 어울리지 않다고 여겼다.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고 주위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날이 '나'에게는 노가다의 마지막이자 유학 생활도 마지막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가 노가다라도 하며 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살 계획을 마친다. 거칠어진 손의 자아를 마침내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오래된 기억
마지막 작품인 '오래된 기억'은 저자의 삶의 흔적이 가장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허구이지만 허구만은 아닌, 그 어느 경계에 서있는 저자의 모습이 잔잔하게 그려진 작품이다. 김승옥의 '무진기행'과 한강의 '소년이 온다', 마치 이 두 작품이 심층에 녹아 있으면서도 저자만의 독특한 경험이 한데 어우러져 탄생한 작품인 것만 같다. 참고로, 이 단편소설은 2013년 재회동포문학상 소설 부문 최우수상을 받은 작품이다. 광주대학살이 벌어졌던 1980년, 주인공 환길은 대학생이었다. 지금은 오십 중반에 이른 중년의 남성이다. 아내와는 이혼을 했고, 큰 딸은 시집을 갔으며, 작은 딸은 대학에 가느라 집을 떠났다. 그래서 환길은 외톨이다. 이혼 후 정리가 어느 정도 되자, 환길은 늘 해오던, 한국에 다녀오고 싶다는 생각을 실천에 옮긴다. 남은 인생을 한국에서 보낼 가능성도 열어둔 상태라 그것도 점검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삼십 년 만에 찾은 한국은 너무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다. 미국 엘에이 한인타운에 거주하면서 늘 한국 뉴스를 놓치지 않던 그였지만, 실제로 그가 다니던 대학과 고향을 방문했을 때 직접 피부로 느꼈던 것은 차원이 전혀 다른 문제였다. 미국에서의 삶이 늘 겉돌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낼 만큼 미국에서 오래 살았지만, 그래서 반대급부로 오래된 기억 속에 더욱 아름답고 아련하게 자리하고 있던 한국을 방문했었지만, 정작 그가 느낀 건 또 다른 맛의 이질감이었다.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모두 고향을 느끼지 못하는 경계인이자 주변인,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으로서의 슬픈 정체성을 가진 이가 바로 이 작품의 주인공 환길이다. 이 작품 속에는 두 시공간이 동시에 흐른다. 젊었을 때의 환길과 현재 중년의 환길이다.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란 환길은 고등학생 때부터 서울 생활을 했다. 대학 시절 학생운동에도 가담했으나 과외 학생이었던 영선과의 육체적 접촉으로 인해 생긴 아이로 말미암아 미국행이 결정되었었다. 영선과의 결혼은 결국 파혼을 맞이했고, 현재의 환길은 흰 머리가 생긴 중년남성이 되어 한국을 다시 찾은 것이었다. 예정보다 일찍 엘에이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환길은 자신의 과거로의 여행이 끝났음을 알아차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또 다시 과거와 현재의 경계에 서서 아름다운 인생의 의미를 물을 것이다. 이민자의 애환은 경계에 서있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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