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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읽기를 위한 또 하나의 좋은 가이드.
C. S. 루이스 저, '시편 사색'을 읽고.
유진 피터슨의 '한 길 가는 순례자'처럼 이 책 역시 시편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저에게 한층 더 가까이 다가온 느낌입니다. 위에서 아래가 아닌 바로 옆에서 말을 건네는 느낌이랄까요. 아무래도 저자가 목사인지 아닌지의 여부가 그 차이를 만드는 것 같습니다. 화자와 청자의 거리가 좁혀진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그렇습니다. 저자인 루이스도 '들어가는 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비전문가가 비전문가를 대상으로 쓴 글입니다. 루이스의 명성에 비하면 겸양의 뉘앙스가 진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 책을 쓴 이유는 독자와 같은 학생으로서 '의견 교환'을 하려는 것이지, 선생으로서 강의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고요.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독자는 목사의 설교나 교수의 강의를 들을 때의 경직된 자세로부터 해방 받을 수 있습니다. 조금은 흐트러져도 될 것 같고 정장이 아닌 편안한 차림으로 저 앞이나 위가 아닌 그저 옆을 바라보면서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면 되니까요.
루이스의 책을 여러 권 읽다 보니 한 가지 요령이 생겼습니다. 루이스의 필체에 익숙해지려면 다른 책들을 읽는 속도보다 조금은 빨리 읽을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존대어를 사용한 번역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루이스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호흡을 조금 빨리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용이 결코 쉽지도 않고 편안한 필체도 아니기 때문에 저 역시 처음에는 집중해서 천천히 읽으려고 노력했었습니다. 그러나 천천히 한 번 읽는 것보단 빨리 두 세 번 읽는 편이 루이스를 읽기에는 더 적합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루이스가 하고 싶은 말이 어떤 맥락에서 진행되고 있는지를 파악하고 있어야 하겠지요. 맞습니다. 루이스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숲을 먼저 명확히 인지한 다음 나무의 설명을 마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루이스가 친절하게 전해주는 이런 저런 비유를 섞은 나무 설명을 듣다가 정작 그 안에 담긴 핵심 메시지를 놓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는 영국성공회 신자로서의 루이스가 그의 다른 저서에서보다 더욱 두드러진 느낌입니다. 비록 그가 교파 간에 논쟁이 되는 문제들은 피하려고 애썼다고 이 책의 앞부분에서 밝히고 있지만, 여러 시편에서 그가 사색하고 해석하여 우리에게 말해주는 부분 (특히 마지막 장, '시편에서 두 번째 의미들'에서)에선, '우리의 기도서' 같은 성공회 신자가 아니라면 익숙하지 않은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순전한 기독교'와는 달리 기독교를 변증하는 내용이 아니라 성경의 시편을 해석한 뒤 본인의 묵상을 나누는 내용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가 속한 배경이 묻어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겠지요.
루이스는 우리들이 시편을 읽을 때 무엇보다 시로 읽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시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것에 몸을 주는 하나의 작은 성육신'이라는 멋진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지요.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라 치부할 수도 있지만, 저 같은 경우만 해도 시편을 가끔 읽을 때면 산문 형태로 써진 내러티브를 읽어나갈 때와 그리 다르지 않은 자세로 대하거든요. 운문을 가진 형태로 시편을 대하는 것이 아마도 시편 저자의 바람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물론 각 언어에 따른 번역에 따라 시의 운율이 영향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루이스는 '평행법'과 같은 시적 기술은 번역에 상관없이 어느 나라 말이든 그대로 살아있기 때문에, 시편을 시로 충분히 즐길 수 있다고 말해줍니다. 아직 시편의 맛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저에게는 아주 좋은 조언이 되었습니다. 내년에는 유진 피터슨과 C. S. 루이스가 조언해준대로 시편을 즐겨보기로 다짐해봅니다. 성경이 가진 문학성을 즐길 수 있다면 성경을 더 맛있게 달게 여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루이스는 시편에서 말하는 흉악스러운 단어들에 대한 그의 생각을 우리들과 나눕니다. 이를테면, '심판', '저주', 그리고 '죽음'이라는 단어들입니다. 시편을 몇 번이라도 읽어보신 분들은 아실 테지만, 많은 시편에서 시편 기자는 성난 고소인으로 등장합니다. 하나님을 의로운 재판관으로 상정을 하고 정의로운 판결을 바라는 마음이 전제가 되어 있는 내용이 의외로 많은 곳에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들처럼 자신을 법정의 피고석에 배치해두는 형사재판에서나, 유대인들처럼 자신이 원고석에 앉아 있는 민사재판에서나 동일하게 하나님의 바른 심판을 소원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약하고 힘없는 모든 사람들은 구원과 해방을 받을 것이고, 불의를 행하며 갑질을 한 이들은 처벌을 받고 배상을 해야 하는 입장에 처해질 것입니다. 여호와의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심판뿐만이 아닙니다. 시편에는 보란 듯이 악인을 향하여 분노를 솔직하게 표출하며 가끔은 속물스럽게 느껴지기도 하는 표현까지도 서슴지 않고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시편 중 하나인 23편에서도, 사람들 앞에서 그들을 배 아프게 만들어야 비로소 자신의 행복이 완전해진다고 고백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루이스는 잊지 않고 한 가지 조언을 합니다. '어쨌든 성경에 나오는 것이니 시편 기자의 복수심도 분명 선하고 경건한 것이다'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이지요. 다만, 그 분노의 원인을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분노 후 복수심을 품는 것은 죄이지만, 시편 기자의 솔직담백한 분노와 복수심의 표현은 적어도 복수심을 품는 사람들이 그러한 죄의 유혹을 느끼는 것 이하의 수준으로는 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거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리고 루이스는 마치 하나님도 악인이 시편 기자의 바람대로 복수를 당하는 것을 기뻐할 줄로 착각해서도 안 된다고 지적해줍니다. 하나님은 의인뿐 아니라 악인이 죽는 것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원수들의 죄에 대해서는 시편 기자들의 표현과 마찬가지로 가차 없는 적대감을 갖고 계십니다. 죄인이 아니라 죄에 대해서 말입니다.
알다시피 구약성경에는 신약성경과는 달리 내세에 대한 믿음이 거의 또는 전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은 그저 죽은 것일 뿐,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루이스는 내세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을 중심에 둔 신앙에 뒤따라오는 필연적인 결론 같은 거라고 말해줍니다. 그리고 사실 천국이 하나님과의 연합을 의미하지 않고 지옥이 그분과의 결별을 의미하지 않는 곳이라면 천국이나 지옥에 대한 믿음은 해로운 미신에 불과하다고 일축해버립니다. 내세에 대한 바른 믿음은 하나님을 생각의 중심에 둔 상태에서만 확고하게 유지되는 것이지요.
이어서 루이스는 '여호와의 아름다움'에 대해 해석을 하며 예배를 이야기합니다. 루이스에게 시편의 가장 큰 가치는, 다윗이 춤추게 만든 즐거움 같은 하나님을 향한 즐거움이 표현되어 있다는 데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우리가 자주 행하게 되는 마지못한 예배 참석과 힘없이 처진 형식적인 기도 생활입니다. 종교적인 요소와 단순한 축제적인 요소의 구분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은 결국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에는 놀라우리만큼 강력하고 활기 있고 용솟음치는 무언가가 표현되어 있다고 합니다. 선의의 시기심으로 바라보게 되는, 우리 자신도 거기에 감염되기를 바라는 무언가가 있다고 말이지요. 저 역시 예배가 한낱 종교의식으로 전락하지 않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재미있는 부분도 나오는데, 그것은 루이스가 처음 신앙에 끌리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신앙을 갖고서도 꽤 오랫동안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신앙인들의 귀 따가운 소리가 늘 걸림돌이었다는 고백입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이었던 것이지요. 누군가가 자기를 찬양하면 무언가를 그 댓가로 해주겠다고 한다면, 지각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콧방귀를 끼거나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다고 비웃거나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루이스는 언젠가부터 하나님은 찬양 받을 자격이 있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단순히 찬양 받는 대상에 머물지 않고 입법자로서 우리에게 찬양을 명령하시는 분이라는 사실까지도요. 또한, 찬양은 그저 찬사나 경의를 표하는 데 쓰이는 것만이 아니라, 기쁨이 자연스럽게 넘쳐나는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까지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은 서로 다른 두 가지가 아니라 똑같은 하나라고 하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영화롭게 할 것을 명령하심으로써 자신을 즐거워하는 삶을 살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계시다고 역설합니다. 찬양이 세속화되고 하나의 형식이나 순서에 지나지 않는 수준으로 전락한 우리 시대를 가만히 돌아봅니다.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임을 다시 고백합니다. 진정한 기쁨으로, 그분을 위해서 그리고 동시에 우리 자신을 위해서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삶은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에 있다는 믿음의 선진들의 고백에 아멘으로 저도 화답합니다.
시편을 통해 노래도 할 수 있고 기도도 할 수 있다고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좋은 방법들만을 숙지하고 있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저도 내년에는 시편을 묵상하고 사색하며 노래와 기도를 맛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좋은 가이드를 만난 축복의 마침표는 가이드가 먼저 경험했고 전수해준 노하우를 실제로 체험하는 순간에 있을 것입니다. 시편 기자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시편을 운율이 있는 시로 읽어나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하나님나라의 거대한 두 기둥인 정의와 공의를 맛볼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루이스 읽기
1. 예기치 않은 기쁨: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098756400169131
2. 고통의 문제: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126994814011956
3. 헤아려 본 슬픔: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138735802837857
4.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471812539530180
5. 천국과 지옥의 이혼: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559914580719975
6. 순전한 기독교: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747418798636218
7. 시편 사색: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816749868369777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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