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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의 예감: 책임과 혼란.
줄리언 반스 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고.
이 책의 원제는 ‘The Sense of an Ending’이다. 저자의 뛰어난 필력, 그리고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짜임새 있는 작품의 전개 덕에 숨가쁘게 책을 다 읽고, 쉴 시간도 없이 다시 책장을 앞뒤로 뒤적거리다가, 순간적인 전율과 함께 내용을 파악하고 나서야 난 비로소 한국어 제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원제를 직역했거나 – 이를테면, ‘끝의 예감’ 정도로 – 번역을 아예 하지 않았더라면, 책을 읽기 전 이 책에 대한 나의 인상은 분명 달랐을 테고, 저자의 의도는 물론 작품 속 복선 같은 여러 상징적인 메시지들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일 수 있었을 것 같다.
한국어 제목은 마침표를 찍어버리는 효과를 내는 반면, 영어 원제는 끝이 열려 있다. 예감에 대한 결론을 함부로 내지 않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책을 영화화한 작품 역시 한국어 제목과 같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론 좀 실망스럽다. 작은 뉘앙스의 차이지만 내겐 원작을 전달하는 차원에 있어서, 비록 겉으로 보이진 않지만, 제목에 붙은 마침표의 유무가 의외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뭐랄까, 보이지 않는 마침표가 처음부터 상상력을 제한시킨다고 할까.
어쨌거나 그렇게 난 한국어 번역본으로, 그래서 사뭇 강제로 제한된 상상력으로 이 책을 시작했다. 그러나 250 페이지 정도 되는 두께를 약 두 시간에 걸쳐 몽땅 다 읽어버리고 말았다. 기대를 별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얻은 의외의 수확이었다.
저자 줄리언 반스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치밀하게 설계라도 한듯 독자의 몰입을 이끌어낸다.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결말, 그러나 이미 그 결말을 암시하는 복선이 작품 여러 군데 깔려 있었음을 뒤늦게서야 ‘아..이럴수가. 그게 그런 의미였구나!’ 하며 깨닫게 되는 책. 이런 소름 돋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면, 난 이 책을 주저없이 권한다. 고전소설이 가져다주는 고유하고 묵직한 매력은 없지만, 현대소설만이 가지는 참신함과 순발력 (그러나 상대적으로 어쩔 수 없이 가벼운) 등으로 반나절 즐거운 독서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관통하는 가장 큰 복선은 아무래도 소설 속 화자인 토니의 고등학교 역사 수업 중에 등장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역사를 정의하는 조 헌트 선생님의 질문에 학생들이 제각기 다른 의견을 내는 장면이다. 토니는 “역사란 승자들의 거짓말”이라며 거의 본능적인 대답을 했다. 이에 선생님은 기다리기라도 했다는듯, “역사는 또한 패배자들의 자기기만이기도 하다”고 첨언했다. 반면, 이 소설의 비극적이면서도 신비로움을 머금은 인물 에이드리언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에이드리언은 토니와 늘 함께 하던 패거리에 뒤늦게 합류했었지만, 어느새 조용히 우월한 입지를 선점하는 독특한 이미지의 인물이었다. 생각하는 수준이 다른 차원에 있는 것 같았으며, 함께 있어도 따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동시에, 그는 언제나 암묵적인 리더였다. 또한 그는 학업에서도 남달랐는데, 그의 월등한 성적은 케임브리지에 입학할 정도였다. 토니의 어머니 말씀을 빌자면, 에이드리언은 “너무” 똑똑했다.
베로니카. 주인공 토니가 대학 시절 잠시, 하지만 의미 있게, 사귀었던 여자 친구 이름이자 노년의 토니와 재회하게 되는 인물이다. 사귈 땐 그녀의 집에 초대 받아 그녀의 가족과 함께 한 달 간 머물기도 할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하지만 베로니카의 속마음을 언제나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토니는 결국 그녀와 헤어진다. 그리고 뜻밖에도 에이드리언이 베로니카와 사귀기 시작한다. 비극의 불씨였다.
당연히 탐탁치 않았지만 토니는 자신이 둘에게 쓴 편지에서 쿨하게 둘의 관계를 인정하고 둘의 행복을 빌어주었다고 기억한다. 그렇다. 눈치 챘겠지만, 이 책은 예순이 넘은 토니가 과거를 회상하며 쓴 기억, 즉 그의 역사다. 비극적인 건, 그 역사가 고등학생 시절 자신이 역사 수업에서 대답했던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버렸다는 점이다. 그가 둘에게 썼던 편지 내용은 전혀 쿨하지 않았다. 40년이란 세월이 지나서 자신이 쓴 편지를 읽게 되었을 때, 그는 곧장 자신의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상스럽기 그지없고 추잡스럽고 악의가 가득한 저주의 말들이었다.
토니는 자신이 썼던 그 편지를 다시 읽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베로니카의 어머니가 죽으면서 자신에게 남긴 유산에 관한 편지 한 통이 수면 아래 있던 그 기억의 문을 열어버렸다. 기대 밖에도 베로니카의 어머니가 토니에게 남긴 건, 짧은 편지, 500달러, 그리고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이었다. 토니는 앞의 두 항목은 그런대로 이해할 만했지만, 마지막 항목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베로니카가 아닌 베로니카의 어머니가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그는 도저히 이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 일기장은 현재 베로니카가 가지고 있다고 했다.
수소문 끝에 베로니카의 이메일을 알아내서 연락을 취하는 토니. 그녀를 다시 만나기도 하면서 그는 이십대 시절에 그녀에게 느꼈던 감정을 다시 느낀다. 하지만 베로니카의 반응은 그때와 같이 쌀쌀맞다. “넌 여전히 감을 못 잡는구나. 넌 늘 그랬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느지막한 나이에 그녀와 재회한 첫 날, 토니가 그녀로부터 받은 게 바로 자신이 이십대 때 썼던 그 편지다. 추악한 그 편지의 정점은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의 미래를 저주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 저주는 혹시라도 둘 사이에서 생겨날 아이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토니는 여전히 베로니카가 왜 에이드리언의 일기장 대신 그 편지를 주었는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그녀를 세 번재 만나던 날, 그녀는 갑자기 토니를 데리고 어떤 자택 요양 간호 대상자를 만나러 간다. 그 대상자는 나이가 젊었다. 베로니카의 아들이 있다면 아마도 저 나이겠다 싶었다. 그 이후 토니는 베로니카의 의중을 알고 싶었는지 계속해서 그 곳을 찾는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 간호 대상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고는 그가 에이드리언의 아들임을 확신하게 된다. 너무나 똑같이 생겼고 행동거지가 닮았기 때문이었다.
토니는 마음이 아팠다. 자신의 저주가 현실이 되어있음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로니카에게 사죄의 편지를 쓰고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토니는 자신의 기억이 그렇게나 부정확하다는 점을 인정하게 되었으며, 그의 역사는 결국 에이드리언의 대답처럼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임도 증명하게 된 셈이었다.
그런데 이게 결말이 아니다. 토니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에이드리언의 아들이 있는 곳을 또 찾아간다. 그리고 뒤늦게 알게 되는 충격적인 사실. 그건 에이드리언의 아들의 보호자로부터 들은 뜻밖의 사실이었다. 베로니카는 엄마가 아니라 누나라는 것이었다!
이럴수가. 그제서야 나 역시 토니가 젊었을 적 한 달 간 머물었던 베로니카의 집에서 토니가 느꼈던 베로니카의 어머니에 대한 묘한 감정과, 그가 베로니카와 헤어진 뒤 베로니카의 어머니가 친필로 작성해서 보냈던 위로 편지의 숨은 의미를 알 것만 같았다. 또한 베로니카가 의도적으로 토니를 자신의 어머니와 단 둘이 있도록 상황을 만들었고, 그 이후 토니에게 좀 더 애정을 준 이유도 알 것만 같았다. 베로니카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녀의 어머니는 어머니가 아니라 경쟁자였음을 말이다. 어쩌면 토니가 베로니카의 집에서 에이드리언에 앞서 베로니카 어머니의 유혹에 넘어갔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토니 어머니 말씀대로 토니는 좀 덜 똑똑해서 (덜 민감해서) 그 유혹을 몰랐을 뿐이었던 것이다.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에이드리언. 토니는 40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싸늘하게 대했던 베로니카의 얼굴표정과 태도도 모두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는 책임감을 느꼈다. 죄책감을 느꼈다. 토니는 책의 마지막에 이렇게 쓴다. “거기엔 축적이 있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 혼란이 있다. 거대한 혼란이.”
어찌 보면 이 책은 싸구리 3류 영화 같은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보이지 않는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 작가의 뛰어난 필력과 스토리 전개 때문이다. 그리고 그 스토리 전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인간의 심리와 본성 등을 탁월하게 짚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억에 대해서, 나의 역사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나의 역사는 나라는 승자의 거짓말로 도배되고 있는지, 아니면 나라는 패배자의 자기기만으로 가득차 있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부정확한 나의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나의 확신만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눈을 감고 곰곰히 생각해 본다. 그리고 눈을 뜨고 나도 토니처럼 책임과 혼란을 느낀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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