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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할 용기: 이웃사랑을 위한 선작업.

브레네 브라운 저, ‘진정한 나로 살아갈 용기’를 읽고.

다음은 시인 안젤루의 시 ‘그래도 나는 일어서리라’의 일부다.

“어디에도,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깨달을 때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그럴 때 어디에나 속한다고 느끼죠. 비싼 값을 치러야 하지만 커다란 보상을 얻게 됩니다.”

저자 브레네 브라운은 대학생 시절 이 시를 처음 접했다. 그리고 그 이후 모든 게 바뀌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소속감, 그 중에서도 ‘진정한 소속감 (True Belonging)’에 대해 깨달아가는 저자의 여정을 그린다. 저자는 어릴 적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 ‘가족’에조차 속할 수 없었던 마음의 상처를 지닌 아이였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그런 사람 (아이)이 아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황야’로 나아갔으며, ‘진정한 나’와 마주했고, ‘나’와 ‘타자’를 신뢰할 줄 알게 되었으며, ‘진정한 공감’과 ‘진정한 유대감’을 맛보고 그것을 기반으로 한 ‘진정한  소속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분노를 느낄 정도로 거부감이 심했던 안젤루의 시는 결국 살아나 그녀의 역사가 되었다.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어릴 적 상처는 그녀에게 불안과 두려움을 가져왔다. 그때 각인된 상처는 고통의 근원이었다. 가족에까지 소속되지 못했던 감정은 마음과 영혼과 자존감을 충분히 파괴하고도 남는 상처였다. 급기야 그녀는 부모 간의 불화로 인해 수치감까지 느꼈고, 그 누구에게도 위로 받지 못한 채 외톨이가 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남편이기도 한 스티브를 만나게 되면서 그녀는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한다. 말없이 수치스럽게 여기며 괴로워하는 대신, 용기 내어 마음 속 두려움과 상처를 털어놓으며 스티브로부터 진정어린 공감과 이해를 받는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건 빛이었다. 사랑이었다. 어둡고 외로운 숲을 지나는 동안에 받은 단 한 사람으로부터의 진심어린 공감, 그 유대감. 이는 구원이란 단어를 쓰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결혼을 하고 나서도 여전히 ‘진정한 소속감’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답을 내지 못했던 그녀는 어느날 남편과의 대화에서 유레카를 외친다. 

“당신이 당신다운 모습으로 나타나 자기 자신과 일을 진실하게 이야기한다면 당신은 언제나 그 자리에 속할 거야.”

Second Round의 시작이었다. 그 이후 그녀는 조금씩 더 ‘진정한 소속감’에 대해 깨달아가기 시작한다. 혼자이지만 그와 동시에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고 느끼는 양극단의 공존 가능성을 보게 된 것이었다. 안젤루의 시가 그녀의 삶에서 비로소 구체적으로 서서히 역사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말한다. “진정한 소속감은 불완전한 진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낼 때만 생긴다”고. 이 글귀를 읽고 나는 한 방 맞은 듯했다. 참으로 맞는 말이다. 자신의 취약함을 두려움 없이 드러낼 줄 아는 건 용기다. 취약함은 나약함이 아니란 저자의 고백에서 나 역시 용기를 얻는다. 홀로 설 용기, 완전히 홀로 설 수 있는 용기. 이는 곧 ‘나다움’이다. 어딘가에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서 가장 먼저 행해져야 할 과정은 ‘내가 나에게 속하는 것’이다. 이때의 ‘홀로’는 결코 외로움이 아니다. 그건 오히려 자유다. 나 자신은 물론 타자와도 함께 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함께 하는 현재, 지금 여기’를 누릴 수 있는 힘.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닌 이 신비로운 힘. 이 자유는 진정한 소속감으로부터 나오며, 진정한 소속감은 진정한 나를 발견하기 위해 취약한 모습마저도 담담히 드러낼 줄 아는 솔직함이 깃든 진정한 용기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자신이 안전하고 평안하다고 여기는 안방, 즉 안전지대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진정한 소속감을 원하는 자는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이미 많고 많은 예언자와 체제 저항자, 모험가가 거쳐가며 힘을 얻고 답을 얻은 ‘황야’로 담대히 나아가야만 한다. 

황야는 기꺼이 홀로 설 만큼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속하는 소속감이 깃든 곳이자 우리가 발 디딜 가장 용감하고 성스러운 곳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그리고 진정한 소속감을 체험하는 데 필요한 특별한 용기는 황야에 용감히 ‘맞서는’ 용기일 뿐만 아니라 황야가 ‘되는’ 용기라고 덧붙인다. 또한, 나와 타자를 신뢰하는 과정은 자기 자신을 어딘가에 맞춰 적응시키려는 헛된 노력이 아닌,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여정, 즉 ‘내가 나에게 속하는 여정’에 필수라고 역설한다. “Just be yourself!”, “This is me. All is fine!”, and  “I am fully allowed to enjoy this moment!” 곧 황야에서 일어나는 역사다. 

황야에서 마주할 수 있는 진정한 소속감과 진정한 자유함은 홀로 설 줄 아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그건 결코 홀로 이룰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저자는 자신의 실제 경험과 자신의 연구 데이터들을 기반으로 하여 타자와의 진정한 유대감이야말로 진정한 소속감을 얻기 위한 척도임을 간파해낸다. 우리는 살면서 모두 외로움을 느낀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은 단순히 철학자의 현학에 그치지 않는다. 요즘은 어린 아이도 충분히 느낄 정도로 우리 모두가 실제로 맛보는 현실이다. 편 가르기가 팽배하고 비인간화가 낭자한 세상에는 결코 소속감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린 아군이 아니면 적군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야 하며, 사람들의 개소리에도 관대하고 예의를 갖추어 진실을 말할 줄 알아야 하며, 획일성이 아닌 다양성과 개별성을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 수만 있다면, 진정한 소속감은 그리 어려운 것만은 아닐 거라는 저자의 말에 나는 하마터면 아멘으로 화답할 뻔했다. 저자가 바라마지 않는 세상은 곧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나라의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면 나타날 모습과도 닮았기 때문이다.

책에서 한 가지 재미났던 부분은 가짜 유대감에 대한 내용이었다. 우리가 흔히 맺곤 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의외로 비난으로 맺어진다는 말에서 나는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저자의 표현대로, 비난으로 맺어진 유대감은 비난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가치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나누고 공감해야 할 것은 어떤 공동의 적이 아닌 기쁨과 고통이다. 순수한 사랑이다. 그것이 ‘진짜’ 유대감일 것이다. 아, 나는 이런 유대감을 맛보며 살아가고 있을까!

살면서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너머를 보려고 하며 그것에서 의미를 찾는 우리 인간은 소속감을 느끼고 안정감을 얻으려 한다. 이는 거의 본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소속감의 시작은 진정한 ‘나’의 발견에 있다. 진정한 나를 대면하여 찾아내고 그 모습으로 살아갈 용기를 가지고서, 나 자신을 너머 타자까지도 신뢰할 수 있는 자세로 서로의 기쁨과 고통을 나누고 공감할 수 있다면, 진정한 유대감은 자연스럽게 얻어질 수 있는 열매이지 않을까 싶다. 다만, 그러기에 앞서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단, 거치기만 하면 언제나 꿀보다 단 열매가 기다릴) 황야로 나아갈 용기를 우린 가져야 한다. 타자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기 전에 ‘나’를 먼저 사랑할 줄 아는 것도 바로 이 용기와 흐름을 같이 할 것이다. 진정한 나로 살아갈 용기.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선작업. 곧 나를 사랑하는 용기. 이런 용기가 궁금하다면 난 이 책을 자신있게 권한다. 잔잔한 감동과 함께 무언가 가슴 속에서 꽉 쥐어지는 용기를 만날 수 있을 것이며, ‘홀로’의 진정한 의미와 ‘유대감’과 ‘소속감’, 그리고 ‘자유’의 의미까지도 서로가 모순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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