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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너머를 향한 갈망, 그리고 진창 속에도 비치는 소박한 구원의 빛줄기.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저, ‘도스토옙스키 (부제: 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를 읽고.
20세기 저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1919년 ‘로마서’ 제 1판을 출판한다. 이어서 3년 뒤 1922년, 제 2판을 출판한다. 2판은 1판과 많이 달랐다. 전면 수정이었다. 바르트 스스로도 거의 모든 부분을 다시 썼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그의 신학에 큰 변화가 찾아온 것이었다. 그 변화로 인한 차이 때문에 ‘로마서’ 제 2판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떨어진 폭탄’이라는 별명까지 갖게 된다. 도대체 3년 동안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한 가지 단서는 ‘로마서’ 제 2판 서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1판 서문에는 없던 내용이다. 거기서 바르트는 자신의 새로운 성서 해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상가로 키르케고르, 그리고 뜻밖에도 러시아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언급한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신학자도 철학자도 아닌, 학위라곤 하나 없던, 러시아 출신의 생계형 소설가 이름이 당시 기독교 실존주의 철학자로 알려졌던 키르케고르와 나란히 전면에 등장했던 것이다.
1판과 2판 사이의 3년이란 시간은 제 1차 세계대전이 만들어낸 균열의 틈으로 시대를 해석하는 새로운 신학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것은 (‘해제’에서 김진혁이 썼듯) ‘인간성의 깊은 어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식 없이 응시하면서, 깨어지고 부서진 인간을 찾아오는 신적 자비에서 희망을 찾는 신학’이었다. 하나님의 내재성보다는 다시 초월성을 강조하는 신학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신학은 당시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서 배우지 못한 통찰을 던져줄 누군가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바로 그 누군가가 바르트에게는 도스토예프스키였던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를 바르트에게 소개해준 친구가 이 책의 저자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김진혁은 다음과 같이 썼다. “바르트가 이후에 밝혔듯 투르나이젠이 없었다면 바르트는 사회주의에 경도된 그저 그런 시골 동네 목사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신정통주의의 문을 연, 20세기 이후 오늘날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바르트 신학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있었으며, 둘 사이에 다리를 놓은 인물이 바로 투르나이젠이었다.
신학자 혹은 목회자로 알려지기보단 바르트의 친구로서 더 잘 알려진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그는 도스토예프스키 작품들을 읽고 깊이 연구했으며, 대부분의 강연에서 도스토예프스키에 관련된 이야기를 거의 빠뜨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연구는 1921년 스위스 아라우 대학생 총회에서 행한 강연으로 세상에 공식적으로 선보였으며, 그 강연 내용을 다듬어서 출간한 책이 바로 이 책 ‘도스토옙스키’이다. 번역은 ‘로마서’ 제 2판을 번역한 손성현이 맡았고, 김진혁이 해제를 담당했다.
감상 및 리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일러둘 것이 있다. 이 책의 이해와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적어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죄와 벌’, ‘백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즉 5대 장편이라 일컬어지는 소설 중 세 편은 먼저 읽고 접하는 편이 좋다. 그러한 공감대 없이 무턱대고 이 책을 읽게 된다면 아마도 난해하다거나,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거나, 표면적으로만 이해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을 읽고 진지하게 그와 그 작품들을 이해하려고 애쓴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비록 200 페이지도 되지 않는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과 사상을 한층 더 깊이 이해하는데 탁월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이 책은 그야말로 도스토예프스키와 그 작품들 이면에 흐르는 중심 사상에 대한 해제다. 도스토예프스키라는 깊은 우물에서 길어올린 물을 마셔본 사람이라면, 난 이 책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강력히 추천한다.
평온한 삶을 살던 사람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처음 만난다면 과연 어떤 느낌을 받게 될까. 저자 투르나이젠은 그것이 마치 눈 앞에 갑자기 원시 야생의 세계가 펼쳐지는 느낌과 같을 것이라고 표현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맛을 본 독자들이라면 이 말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별다른 표현이 없어도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포장을 다 뜯어내고 남은 날 것 그대로의 삶, 그 이면에 붉은 피처럼 선명하게 녹아있는 인간의 추악한 본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진창 가운데서도 꺼지지 않고 진주처럼 빛나는 저 너머를 향한 인간의 끊임없는 갈망의 불씨, 그리고 마침내 저 너머에서 소박하게 찾아오는 구원의 빛.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대부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이러한 요소들이 우리 모두에게 공명을 일으키는 이유는 결국 우리네 인생도 작품 속 인생과 하등 다를 게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도스토예프스키를 통해 인간성의 불가사의함과 수수께끼로 가득찬 원초적인 삶을 마주하게 되고, 그 안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투르나이젠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에 이르게 되리라고 말한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투르나이젠이 간파한 것처럼 이 단순한 질문이 곧 도스토예프스키와 우리의 공통된 질문, 다시 말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궁극의 질문이다. 저자는 이 질문이야말로 도스토예프스키가 던진 유일한 질문이라고까지 말한다. 인간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선 도스토예프스키를 피할 수 없다며 투르나이젠은 그를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중요한 통로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도스토예프스키는 책상 앞이 아닌 현실 한복판에서 그 현실을 이야기로 만들었고, 그 시대의 흐름을 낱낱이 관찰하고 파악한 후 작품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갓 잡은 큰 물고기가 퍼덕대는 것처럼 살아있다. 야생 그대로의 느낌이다. 또한, 저자의 표현처럼, 그는 인간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을 진지하게 읽어나가는 독자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그 속에서 자기자신과 자기자신의 인생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단순히 우리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우리에게 일종의 충격을 선사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이것저것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점을 자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답을 얻은 것 같았으나 그 답이 진짜 답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막연하고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에 우린 노출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면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결코 경솔하게 답을 던져주지 않는다. 그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해석되어지지 않은 삶을 우리 앞에 펼쳐보일 뿐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는 한 차원 높은 의미의 사실주의자에 불과하다. 나는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낱낱이 보여줄 뿐이다.”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인간의 본성을 파헤친 최고의 심리학자라고 치켜세우지만 어쩌면 그건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무런 해석이나 가치판단이 가미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사실을 드러내어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저자가 간파했듯,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단순한 질문으로 내버려두지 않고 그것이 이미 해답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뒤늦게 깨닫도록 이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즉, 인간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묻는 그 질문 자체에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이 들어있다는 말이다. 수수께기와도 같은 인간, 결코 한 마디로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인간, 한계를 가진 유한한 존재이지만 그 안에는 언제나 저 너머와 연결되어 있는 무언가가 심겨져 있는 인간, 그래서 그 무엇을 갈망하는 인간. 그렇다. 인간 존재에 대한 치열한 질문이야말로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한 아름의 답일지도 모르겠다.
제 2장에서 투르나이젠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세 장편에 등장하는 핵심인물, 즉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세 형제들, 그리고 ‘백치’의 미시킨을 중점적으로 분석하면서 그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추출하여 도스토예프스키의 사상을 역으로 고찰한다. 각 작품에 대한 부분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죄와 벌.
관 같이 비좁은 방 안에서 홀로 세상과 타자와 단절된 채 스스로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 라스꼴리니꼬프는 어설픈 공리주의에 입각한 이념에 빠져 살인을 계획하고, 불행하게도 그것을 실행에 옮겨 버린다. 그 얄팍한 이념의 핵심에는, 자기자신도 나폴레옹과 같은 비범인 (헤겔이 말한 ‘세계사적 개인’에 상응하는 존재)일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을 실제로 확인하고 싶었던 그의 내밀한 욕망이 숨어있었다. 투르나이젠이 간파했듯, 이를 달리 표현하면,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신에게도 ‘모든 것이 허용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믿음과 바람과는 정반대로 그는 도끼를 휘두르고 나서 처절한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고 결국 자수하게 된다. 그리고 시베리아에 가서도 몇 년 뒤에서야 소냐를 통해 인간의 이념으로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저 너머로부터 오는 그 무언가를 마주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은 곧 구원의 빛과도 같았다. 라스꼴리니꼬프는 비로소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있었다. 비범인이 되려고 했던 그 무모한 도약은 스스로 신이 되고자 했던 시도에 다름 아니었으며, 이로 인해 그는 자신도 한계를 지닌 유한한 인간에 불과함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투르나이젠은 라스꼴리니꼬프가 마침내 얻은 깨달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쓴다. “인간의 참된 삶, 본질적인 삶은 지금 여기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모습 너머에 있다는 깨달음이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심연의 바닥에 다다랐을 즈음에야 인간이란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이었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투르나이젠은 ‘죄와 벌’에서 재앙의 중심이 이념에 있었다면,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는 그 중심이 여자 (그루셴카)에 있다고 말한다 (사실 난 이 해석에 완전 동의하진 않는다. 여자뿐만이 아니라 돈 문제를 빼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죄와 벌’에서의 주인공은 명백하게 라스꼴리니꼬프 한 사람이지만,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는 보다 복잡하고 다층적이어서 ‘죄와 벌’에서처럼 재앙의 중심에 어떤 한 가지가 놓여 있다고 동일한 잣대로 해석하기에는 뭔가 억지스러움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투르나이젠은 이 작품에서도 ‘죄와 벌’에서와 마찬가지로,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인간이 결국 다다른 곳은 자신이 죄인 됨을 깨닫고 하나님을 아는 자리였다고 말한다. 카라마조프 가의 핏빛어린 비극 안에도 여전히 최종적인 구원의 불씨가 남아있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외친다. “카라마조프 가의 피가 흐른다고 해서 무조건 구제불능의 운명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 카라마조프 가에 흐르는 총체적 난국이 우리네 삶에 흐르는 그것과 다를 게 없다면, 우리가 처한 운명이라는 굴레 안에도 구원의 빛이 흘러들어 아무리 깊은 바닥에서도 부활을 꿈꿀 수 있는 것이다.
백치.
바보, 정신박약, 머저리, 무지, 그리고 간질. 미시킨 공작에 대한 세상의 평가다. 그러나 투르나이젠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러한 백치 같은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온갖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의 세상을 뒤흔들고, 그들로 하여금 진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게 만든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백치의 존재는 “인생의 참된 의미란 얼마나 깊이 감춰져 있는가?”라는 무거운 질문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고 말한다. 과연 누가 백치이고 누가 지혜자인가? 투르나이젠은 이러한 역설적인 인물 미시킨을 규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특징이 그의 절대적인 모호성에 있다고 본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태도를 지칭한다. 인생의 거대함, 끔찍함, 모호함에 대한 놀람과 경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어린아이 말이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존재. 흡사 그리스도 예수를 떠올리게도 만드는 존재. 저자는 도스토예프스키가 ‘백치’를 통해 다루고 있는 것이 곧 삶의 표현 불가능성, 다시 말해 하나님의 신비라고 짚어낸다. 이는 라스꼴리니꼬프를 뒤흔들었던 것과 같고,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격정에 사로잡혀 뛰어들었던 것과도 같다. 이어서 저자는 나스타샤가 로고진의 격정보다는 미시킨의 연민과 사랑에 더 마음이 흔들렸던 이유가 미시킨을 통해 드러나는 용서의 빛, 즉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의 빛 때문이었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결국 ‘백치’ 역시 ‘죄와 벌’이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처럼 인간의 삶 속에서 얽히고설킨 모든 혼란의 해명과 해결이 갖는 가장 심오한 의미를 짚어주는 단어가 용서, 곧 ‘죄의 용서’라고 말한다. 인간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다 보면 저 너머에 있는 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질문과 같아지고, 그 존재로부터 전적으로 비쳐오는 구원과 용서의 빛을 발견할 기회가 주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세 작품 속 인물들을 통해 들여다본 도스토예프스키의 사상 (혹은 신학)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 삶의 근원에 대한 질문, 곧 하나님을 향한 질문에서 비롯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주지 않는 대신, 독자로 하여금 등장인물을 지표 삼아 옆길로 새지 않고 솔직하게 정면으로 그 질문을 마주하도록 유도한다. 유한한 인간으로 그려지는, 알고 보면 우리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인물들. 투르나이젠은 그들 모두가 자기 자신 너머의 어떤 것을 가리키는 존재라고 해석한다. 곧 하나님의 현존을 가리키는 표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우리 자신과도 같다면, 우리 모두 역시 하나님의 존재를 가리키는 존재다.
하나님의 존재와 구원, 사랑과 용서를 그려내는 작품은 이 세상에 허다하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만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양극성’이라고 투르나이젠은 말한다. 즉, 도스토예프스키는 사실적인, 너무나 사실적인 인물들의 인간성을 작품 속에서 철저히 해부해 놓는 동시에, 그 인물들이 삶과 죽음 너머의 세계를 향해 영원히 도약하는 모습까지도 한 작품 안에서 보여준다는 것이다. 투르나이젠은 이 양극성이야말로 도스토예프스키 인간관의 총체적인 의미일 수도 있다고 하며,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특성과 비인간적이고 탈속적인 특성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고 역설한다. 즉, 투르나이젠이 간파한대로, 완전한 사실주의를 통해 인간 안에 있는 인간을 발견하는 것 (그래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의 핵심적인 경향인 것이다.
투르나이젠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모든 작품은 하나님에 대한 질문을 붙잡고 씨름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가 강조한 핵심적인 통찰은 곧 “하나님은 하나님이다”라는 문장에 함축되어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결코 다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초월적인 존재라는 것, 즉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투르나이젠은 도스토예프스키가 기울인 유일한 노력은, 그 초월적인 하나님을 이상화된 인간 영혼의 일부나 이 세상 현실의 일부로, 다시 말해 오로지 신적인 가능성에 속한 것을 또다시 인간에게 가능한 것, 혹은 어떤 식으로든 설명 가능한 것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었다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를 구성하는 관계, 즉 인생 저편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를 전혀 알고자 하지 않고 감히 신과 같아지려고 도약한다. 곧 반역이다. 반역한 인간들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이반과 스메르쟈코프처럼, 혹은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처럼 “모든 일이 허용되었다”라는 구호를 따르며 타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렇다. 투르나이젠이 간파한 도스토예프스키의 관점은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모순됨, 즉 인간은 결국 하나님을 알고 향하도록 지어진 피조물이지만, 정작 그 궁극적인 하나님의 존재와 그와의 관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을 암묵적으로 드러내면서, 인간이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맞닿은 존재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관점을 이야기하면서 종교와 교회를 겨냥한 그의 공격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투르나이젠은 이러한 면에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인물 이반, 이반이 쓴 서사시 ‘대심문관’, 그리고 이반이기도 하고 대심문관이기도 하며, 혹은 이반과 대심문관을 소유하고 조종한 악마에 대해서 언급한다.
앞서 도스토예프스키가 기울인 유일한 노력은, 가짜 하나님을 진짜로 만들지 않도록, 즉 그에게 하나님의 '하나님 다움'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지켜내는 것’이었고 했다. 이런 면에서 인간의 반역이란 초월적인 하나님을 끌어내려 알 만한 하나님으로 바꿔놓음으로써 (아론의 송아지가 떠오르지 않는가) 문제 상황을 탈피하려고 하는 행위들의 전반일지도 모른다. 투르나이젠이 간파한 것처럼,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당시 세상의 종교와 교회가 교묘하게 이런 인간적인 시도에 가담하고 있음을 꿰뚫어 보았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도 정작 하나님께 반역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인데, ‘대심문관’은 이러한 인간에게 예수는 오로지 ‘자유’만을 선사해주었는 데 반해, 대심문관으로 대표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연민보다 더 큰 연민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사랑보다 훨씬 자상하고 이해심 많은 사랑을 과시하며 인간의 짐을 덜어주고 필요를 채워주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도록 유도했다는 점을 드러낸, 일종의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고소장인 셈이다. 이 고소장이 주장하는 바는 한 마디로, 하나님을 알도록 힘쓰고 돕고 전파하고 그 나라를 살아내는 모델이 되어야 할 교회가 예수가 인간에게 주었던 자유를 빼앗은 뒤 오히려 하나님 자리를 꿰차고 거짓 선지자 혹은 가짜 하나님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는 더 이상 교회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의 껍데기는 그대로이나 예수가 증발한 교회. 어찌 교회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있겠는가. 그건 교회가 아니라 악마와 손잡은, 혹은 악마의 현현 그 자체일지도 모르는 셈이다. 이러한 엄청난 메시지가 담겨 있는 서사시가 바로 이반이 만든 ‘대심문관’이다.
마지막 장에서 투르나이젠은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문장 하나로 운을 띄운다. “형제들이여 인간의 죄 때문에 놀라서 뒤로 물러서지 말라. 비록 죄를 지으며 살고 있더라도 인간을 사랑하라.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사랑의 형상이니라.” 톨스토이는 평생토록 이 비극 너머로 가지 않았다고 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 앞에서 모든 일을 통해서 죄인’이라는 깨달음이 올 때 서로가 불안정한 존재라는 공통분모 덕분에 형제애가 비로소 가능해질 거라면서 ‘죄의 연대’를 이야기했다고 한다. 인간은 깊은 곤경 속에서 함께 버티고 구원을 기다리는 존재다. 이런 맥락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모든 생명과 모든 자연과 모든 인간을 향해 적극적인 관심을 쏟는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을 긍정하되, 그 존재가 지금 그대로의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이기 때문에 지금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역설적 긍정에 다다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톨스토이와 구별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신학은 다음 문장으로 다시 풀어 쓸 수 있다. “당신이 비록 죄를 지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죄와 더불어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의 죄 안에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투르나이젠이 강조한 것처럼, 모든 피조물과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이며, 모든 생명을 향한 적극적인 관심이다.
또한, 도스토예프스키는 진실한 깨달음이 일어나는 곳은 진공상태가 아니라 지금 이 모양 이 꼴의 세상 한복판, 즉 인간 존재의 수렁 같은 문제 상황 속이라고 한 데 반하여, 톨스토이는 그야말로 거센 반항심 속에서 사회에 비판을 가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도스토예프스키는 기존의 세상을 비판하면서도 신기할 정도로 너그러웠던 것이다. 즉, 도스토예프스키는 너무나 불의하고 끔찍한 사건에서도 그 속에 감춰진 긍정성을 찾아냈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혁명의 파토스가 아닌, 그 위대한 이해와 용서의 파토스가 작동한다.
투르나이젠이 꼽은 또다른 톨스토이와의 차이점은, 톨스토이의 작품에서는 필연적으로 경건주의적인 참회의 노력을 떠올리게 되는 데 반하여,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는 비록 그런 결단과 전환의 순간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회심자와 비회심자,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 하나님 자녀와 세상 자녀로의 이분법적인 구분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톨스토이나 경건주의자들의 경우에는 반드시 그런 이분법적 구분이 있어야 하고, 심지어는 그러한 구분이 목표가 되기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 주변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다. 예수 안에서도 오히려 이 세상과 하나님, 죄인과 의인이 모두 함께 어우러졌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려내는 ‘결정적인 변화’ (즉, 구원의 빛이 임하는 시기)는 인간이 종교적 도덕적 노력으로 마침내 다다른 마지막 단계나 가장 높은 단계가 아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 여정은 인생의 바닥에서 하나님의 가능성을 향해 시선을 돌릴 때 가시화된다. 결정적인 변화는 인간이 발버둥치고 억지를 쓴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그분의 영원한 능력에서 흘러나온다. 그러므로 그 변화를 위한 길은 특별한 성인이 가는 길이 아니다. 애쓰며 노력하는 사람의 길도 아니다. 오히려 누가봐도 세상의 자녀인 이들, 심지어 죄인과 창녀와 살인자, 불안하고 절망적인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인 것이다. 용서의 나라로 인도하는 길은 의인의 길이 아니라 죄인의 길이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의미심장한 요소 하나는 어린아이의 존재다. 그는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요구한다.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어린아이처럼 무방비 상태로 인생 앞에 서라고. 절대적인 진실성을 지니고 순진한 무방비 상태로 삶을 맞이하라고. 마치 ‘백치’의 미시킨이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알료샤처럼. 왜냐하면 자신을 하나님께로 활짝 열고 어린아이로 돌아간 사람 속에서는 서서히, 혹은 갑자기 가장 위대한 것이 깨어나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에 대한 감각, 사랑과 구원의 작은 불씨, 한 조각의 부활 말이다.
한 가지 더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하여 따뜻한 애정을 가질 수 있는 점은, 그는 항상 낮은 곳에 있는 겸허한 사람들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투르나이젠도 간파했듯,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개혁과 혁명보다는 그들의 감추어진 힘에 더 큰 기대를 걸기도 했었다고 한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고 부정적인 느낌을 가진 사람은 아마도 읽다가 중간에 그만 둔 사람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만약 한 작품이라도 끝까지 읽고, 가만히 그 작품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본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상관없이, 난 누구나 가슴 따뜻해짐을 경험할 거라고 믿는다. 죄의 심연에도, 그 참혹한 어두움 가운데에도 하나님은 존재하실뿐 아니라, 아직 죄로 흥건히 젖어있는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가슴 벅찬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인 나는 다시금 인간이란 존재는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통해 조물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생각하며 인간의 정체성을 묵상할 수 있었으며, 죄인도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선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자발적 순종으로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아내야겠다는 다짐까지 조용히 할 수 있었다. 이 책을 통해 도스토예프스키 작품들 이면에 흐르는 그의 사상과 신학에 대한 해제를 읽고나니, 그 어떤 신학책, 철학책보다도 묵직하게 내 마음을 울렸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이 더욱 애틋하게 느껴진다. 마치 흩어졌던 파편들이 모여져 정리되는 듯한 기분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22765477768221
2. 백치: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81911478520287
3. 악령: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671867029524729
4. 미성년: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791541264223971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236636616381098
6. 죽음의 집의 기록: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311510975560328
7. 가난한 사람들: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633890636655692
8.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272627856115307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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