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쫓지만 쫓기지 않고, 지배당하지 않는 인생.
무라카미 하루키 저, ‘양을 쫓는 모험’을 읽고.
머리가 복잡할 땐 책을 든다. 그런데 이게 언제나 쉬운 건 아니다. 평소보다 예민한 상태라 아무 책이나 읽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 선정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이번에도 그랬다. 네 권의 책을 폈고 모두 열 페이지 이상 앞부분을 읽었다. 그러나 다시 덮고 책장에 꽂았다. 마음에 담기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손에 들고 이번 주말에 끝까지 읽게 된 책이 무라카미 하루키 책이었다. ‘양을 쫓는 모험’.
하루키 책은 묘한 힘이 있다. 어렵지 않고 무심하게까지 느껴지는 그만의 독특한 문체로 통속적인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건 사고를 매개로 하여 이야기를 술술 풀어나간다. 일필휘지로 써진 글이 아니라 다듬고 다듬어서 기나긴 퇴고의 과정을 거친 글답게 문장이 간결하고 정제되어 있다. 궁금증을 유발하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한 번 읽게 되면 지루하다는 느낌 없이 계속 읽게 된다. 문장력과 글의 전개에 있어서는 정말 배울 게 많은 작가임이 틀림없다.
그 훌륭한 문장력과 전개 방식으로 전달하는 메시지 역시 그냥 지나쳐버릴 만큼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다. 거기엔 무겁고 암울하고 허무하기까지 한 하루키만의 감성이 진하게 배어있다. 이는 어쩌면 하루키와 같은 시공간을 향유한 일본 작가들의 공통된 시대적 감성일지도 모르겠다. 이 감성은 주로 등장인물들의 상실과 죽음 (특히 자살) 등으로 표현된다. 아마 이 두 가지 단어를 빼놓고는 하루키 문학을 설명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든다. 물론 하루키 작품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소재 중 하나는 섹스와 같은 성적인 상상과 행위이기도 하다. 그것도 남자 위주의 관점에서 말이다. 그래서 여자는 대상화되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에 조금은 저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자주 반복됨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이 하루키 문학의 본질인 것처럼 매도하고 하루키를 폄하하는 데엔 반대한다. 성적인 행위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가 심심찮게 등장하여 삼류소설처럼 경박하게 느껴질 때도 종종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해한 하루키 문학의 정수는 성적인 것이 단지 수단으로 사용될 뿐이지 결코 목적이 아니다. 오히려 상실과 죽음의 깊은 강이 하루키 문학 저변에 흐르고 있다고 봐야 하고, 성적인 표현들은 그 강에서 저항하거나 물살에 휩쓸려가거나 무심한 시선으로 자기 자신의 삶조차 관조하는 인물들의 평범함, 즉 그들도 우리와 별 다르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도구로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이런 면에서 하루키 문학은 철학적이고 감성적이며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일본적이다).
‘양을 쫓는 모험’은 하루키가 치밀하게 계획한 구도에 따라 읽게 될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독자는 완전히 작가의 작전에 말려들게 된다. 지루한 부분 없이 호기심을 가지게 되고, 연속해서 긴장과 스릴을 느끼며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다르게 된다. 그런데 책의 마지막 부분이 나에겐 물음표였다. 몰입까지 되며 페이지를 넘겨왔는데 갑자기 덜컥하며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500페이지가 넘는, 결코 짧지 않은 작품이지만, 관념적인 서술보다는 상황 묘사와 대화가 주를 이루기 때문에 도중에 읽어나가는 속도는 빠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다 읽고 나서도 도통 이해가 잘 안 되는 것이었다. 아직 뭔가가 더 설명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도중에서 끝나버린 느낌이 들어 당황스럽기도 했다. 사실 제목부터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결말에 다다르면 알게 되겠거니 했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도 나는 끝내 오리무중이었다. 철학 책처럼 어렵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랬더라면 이틀 만에 읽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려웠다. 아니, 어려웠다는 표현보다는 아리송하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이 작품은 특히나 비유와 상징이 핵심 주제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선 제목에서 등장하는 ‘양’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또한, 언뜻 일상적인 사건을 전개해나가는 것처럼 읽힐지 모르겠지만 꽤나 환상적인 요소가 군데군데 깊이 침투해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을 환상소설이라고 분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환상을 빼고는 이 책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참으로 묘한 작품인 셈이다. 하루키의 문체와 그의 사상과 감성, 이런 것들이 잘 뭉쳐져서 하나의 독특한 문학이 탄생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노르웨이의 숲’이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서 만났던 하루키와는 조금 달랐다. 작품이 써진 시기를 보니 그의 초기 작품이다. 순간 아하! 싶었다. 아직 농숙해지기 전의 하루키의 천재성이 이곳저곳에서 번쩍이다 만들어진 작품이 바로 이 ‘양을 쫓는 모험’이었던 것이다.
책 뒤에 붙어있는 해석을 읽고도 나는 아직도 이 작품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책을 두 번 읽는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그저 ‘양’의 의미를 ‘인간의 탐욕’,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이 농축된 이데올로기의 근원’, 혹은 ‘관념뿐인, 그래서 형체가 필요한 악의 실체’ 등으로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미숙한 생각만 들뿐이다. 양이 사람에게 들어가 사람을 조종하고, 그 사람이 필요 없으면 다시 나와 다른 숙주를 찾고… 여기에 기독교적인 관점만 살짝 집어넣으면 양은 곧 ‘악마’ 혹은 ‘악령’ 정도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양과 악마라... 반대되는 듯한 이 이미지는 기독교적인 영향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런 면에서 주인공의 친구, 결국엔 자살로 생을 마감한 친구 ‘쥐’는 양이 자기 안으로 들어갔을 때 자살을 감행했기 때문에 양에 의해 조종되지 않은 채 인간으로 남을 수 있었던 사람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죽었지만 살았던 사람인 것이다. 악에 물들지 않은, 나약하지만 인간적인 모습을 끝까지 유지한 사람이 바로 ‘쥐’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의 화자인 ‘나’는 ‘쥐’로부터 양을 전달받아 강력한 힘을 얻고자 처음부터 은밀하고 치밀한 계획으로 일관했던 '비서'에게 끝까지 이용당한 꼴이었지만, 양에 이용되지 않고 자살로 미리 생을 마감하여 끝까지 인간으로 남은 친구 ‘쥐’의 폭파 계획에 동조한 끝에 얼떨결에 탐욕스러운 '비서'를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죽음으로 모는 실행자가 된다. 가만히 보면, ‘나’는 자기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처음부터 끝까지 주체적으로 무언가를 결정하거나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누군가의 의지에 끌려가거나 동조하는 등 다소 수동적인 인간으로 그려졌던 것 같다. 그는 '비서'의 말을 듣고 그의 명령 같은 부탁에 의지하여 양을 찾아 나섰지만, 양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설사 알았다 하더라도 그것의 힘에 의지하여 '비서'처럼 무언가를 도모해보려는 욕심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는 양을 찾아냈고, 양이 무엇인지 알아냈다. 나아가, 그는 양에 지배되지 않았고, 양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의 힘을 노린 탐욕의 인간인 '비서'를 궁지로 모는 역할을 해냈다. 나는 이러한 ‘나’가 왜 이 작품의 주인공으로 채택되었는지, 그가 마지막에 펑펑 울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언뜻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우리 모두는 살면서 무언가를 쫓는다. 그런데 그것들이 숭고한 목적만으로 설명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은밀한 탐욕과 이기심 등이 물들어있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우리들은 ‘비서’와 같은 사람이 되지 못하고 ‘나’와 같은 사람으로 머문다. 뭐가 뭔지 잘 모른 채 그 무엇을 쫓다가 지치기도 하고, 누군가의 말에 따라 다소 수동적으로 살아가기도 하고, 어쩌다가 ‘쥐’와 같이 드문 (‘비서’와 정반대의 캐릭터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친구와의 교감으로 ‘악’에 물들지 않고 ‘악’을 폭파시킬 수도 있다. 의지대로 살 수 있는 인간이 ‘비서’로 그려졌다면, 주인공 ‘나’는 의지대로 살지 못하는 나약하고 평범한 우리들의 모습을 반영한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의지대로 살지 못한다고 해서 실패한 삶을 사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의지대로 완벽하게 살게 되면 '비서'가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비서’의 양을 쫓는 모험과 ‘나’의 양을 쫓는 모험을 대비시키며 이 책을 감상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적과 결과는 다르지만, ‘비서’나 ‘나’의 인생은 '양을 쫓는 모험'이다. 우리 인간의 인생이란 어쨌거나 '양을 쫓는 모험'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나는 '비서'처럼 양에 지배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문학사상사
#김영웅의책과일상
'김영웅의책과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가와 요코 저, ‘걷다 보면 괜찮아질 거야”를 읽고 (0) | 2021.05.10 |
---|---|
움베르트 에코 저, ‘푸코의 진자’를 읽고 (0) | 2021.04.29 |
황정은 저, ‘연년세세’를 읽고 (0) | 2021.03.30 |
파스칼 메르시어 저,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고 (0) | 2021.03.29 |
박양규 저, ‘인문학은 성경을 어떻게 만나는가’를 읽고 (0) | 2021.03.08 |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