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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성, 그리고 깊이와 무게.
히가시노 게이고 저, ‘용의자 X의 헌신’ 및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읽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표작 중 두 편 (‘용의자 X의 헌신’,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연달아 읽고 문학작품이 가지는 ‘대중성’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내 생각은 ‘깊이’와 ‘무게’라는 단어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어떻게 대중적인 작품을 쓸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선, ‘인간의 본성과 심리를 얼마나 깊이 파헤치고 드러낼 것인가?’에 대한 답을 먼저 준비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렀던 것이다. 물론 이 물음은 작가가 얼마나 깊이 인간의 본성과 심리를 관찰할 수 있는지 여부에 달린 문제일 것이다. 깊은 관찰이 가능했다면, ‘불편한 진실을 건드릴 것인가? 건드리기로 했다면,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질 것이다. 나는 이러한 물음들로 한동안 시간을 보내면서 인간의 공감능력의 한계와 이기성에 대해, 그리고 공감 이면에도 숨어 기생하는 인간의 은폐술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예측가능성 혹은 성찰과 통찰에 대한 문제이고, 결국 깊이와 무게의 문제다.
두 작품밖에 읽지 못했기 때문에 섣부른 판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작가가 쓴 서로 다른 스타일의 두 작품, 그중에서도 장편소설을 읽어보면 어느 정도 판단이 선다. 그 작가의 작품을 더 읽을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는, 현실적으로 적절한 시기이기도 하다. 작가의 사상과 문체 등을 감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어야만 그 작가를 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작품은 다양할 수 있으나 작가는 한 사람이기 때문에 어느 작품에서든 변하지 않고 공통된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어쨌거나 이 글은 두 작품만 읽은 아마추어 작가의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임을 밝혀둔다. 게이고 작품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언젠가 써질지도 모를 나의 작품상에 대한 나 자신과의 토론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두 작품의 공통점, 나아가 그의 작품 세계를 한 마디로 압축하라고 한다면, 나는 별 망설임 없이 ‘대중성’이라는 단어를 선택할 것이다. 이 단어가 가진 모호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렇게 평가하는 게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조금 부정적인 뉘앙스를 입혀 달리 표현하면, ‘얕고 가볍다’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재미와 별개로 내게 읽힌 게이고의 작품은 얕았고 가벼웠다. 글자 하나하나를 읽지 않고 대충 건너뛰어도 100%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게 술술 읽혔다. 시간 때우기 용으로 재미있는 영화 하나 해치운 것처럼 별 잔상이 남지 않았다. 가벼움 뒤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허무함도 느껴졌다. ‘대중적’이라는 말을 구태여 깎아내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그 말이 가진 경박함을 나는 게이고의 작품에서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이거였나, 이 정도였단 말인가, 하는 아쉬운 생각이 마지막 책장을 덮고 밀려온 첫 감상이었다.
이를테면, 추리소설의 묘미는 예측 불가능성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를 찌르는 추리력, 누구나 간과하고 지나칠 사소한 일상에서 중요한 단서를 찾아내어 독자 앞에서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증명하는 장면. 종종 전율을 느끼기도 하고, 그 사건이 가지는 의미가 오랜 잔상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추리소설은 독자의 예측을 넘어서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적어도 작품 속 탐정은 독자보다는 앞발 앞서 있어야 하는 법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바로 예측 불가능성이 되겠다. 한편, 누가 범인인지도 알고 왜 그런 범행을 저질렀는지 아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건을 풀어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드라마적인 요소를 부각하는 작품도 많이 존재한다. 이 장르를 굳이 추리소설로 분류할 필요까진 없겠지만, 범죄와 탐정 등 추리소설의 주요 장치들이 등장하여 전체 이야기를 끌고 나가기 때문에, 넓은 의미로 추리소설 분류 안에 넣는 데엔 무리가 없어 보인다.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은 위에 언급한 추리소설의 두 가지 형태를 두루 갖추고 있다. 탐정 역할을 맡은, 천재적인 추리력의 물리학과 조교수.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두뇌의 소유자이자 결국 살인자로 밝혀지는 고등학교 수학 교사. 이 둘 간의 알쏭달쏭한 간접적이고 시적이기까지 한 대화 가운데 숨은 허를 찌르는 논리와 추리. 긴장과 스릴. 이 요소들은 전형적인 추리소설이 가지는 예측 불가능성의 묘미를 잘 대변해준다. 반면, 범인이 살인사건에 가담한 이유, 그의 서글픈 개인사, 살인사건이라는 끔찍한 범죄 앞에서 시종일관 보여준 무심한 듯 유심한 따뜻한 인간미, 그 진정성. 이 요소들은 논리, 추리와 별개로 드라마적인 장치로 독자들을 감동시킨다. 나는 이 두 가지의 묘한 배합이 아마도 작가 게이고가 작품 속에서 노린 신의 한 수 같은 장치였으리라고 생각한다. ‘드라마 같은 추리소설’, 내게 읽힌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추리소설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게이고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우선, 이 작품은 추리소설이 아니다. 드라마적인 요소가 전면에 나섰다. 논리와 추리의 공백은 동화를 연상시키는 판타지, 그리고 연작소설인 것 같은 느낌을 선사하는 총 다섯 장의 단편 같은 작품이 모두 나미야 잡화점,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고민 상담 편지 왕래, 어린이 보호시설인 환광원으로 연결된다는 공통점으로 충분히 채워진다. 이루고 싶은 꿈과 살아내야만 하는 현실 사이에서의 갈등, 가족 관계가 여의치 않은 어렵고 가난한 서민들의 이야기, 그 이야기 속에 진하게 배어있는 따뜻한 인간미 등이 작가가 암묵적으로 내세우고 싶었던 부분이 아닌가 싶다. 이 모든 게 내게도 충분히 읽혔다.
장점이라면 장점일 수 있고, 단점이라면 단점일 수도 있는 사실 한 가지는, 두 작품 모두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구성된다는 점이다. 적절한 코미디적인 요소도 군데군데 들어가 있고, 말투나 생각의 흐름이 현대적이라서, 게다가 유럽이나 미국 같은 서양이 아닌 동양, 즉 한국의 옆동네 일본이라는 문화적 요소 때문에 한국 독자들로부터 어렵지 않게 공감을 끌어내는 데에는 아주 탁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나는 이렇게 ‘완벽하게 (?)’ 공감과 몰입이 될 정도로 재미있게 써진 이 작품들이 못내 아쉽다. 그 가벼움 때문에. 그 얕음 때문에.
인간이 공감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가진 어두운 면은 어떤 것일까? 과연 깊고 무거운 이야기들, 가만히 멈춰 서서 진중하게 생각해보면 충분히 누구나 공감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외면하고 마는 이야기들, 감히 수면 위로 끄집어내기 싫은 불편한 진실들, 끄집어냈다가는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을뿐더러 숨기고 싶은 은밀한 본심이 탄로 날까 두려운 이야기들. 이런 것들은 원만한 인간관계에서는 다뤄지기 힘든 이야기들이다. 아무리 친밀한 관계라 하더라도 좀처럼 입 밖에 꺼내지 못하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문학작품이라는 장치에서마저도 이런 것들을 다루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심연에 놓인 진실을 마주하고, 어떻게 우리 안에 상주하는 악하고 이기적인 본성을 인지, 성찰, 객관화하여 보다 나은 인간관계와 삶을 위해 몸부림칠 수 있을까?
이런 이유로 나는 문학작품에 기대하는 게 남다른 편이다. ‘책임감’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그 무엇을 나는 문학작품으로부터 바란다. 이는 내가 언젠가 쓸지도 모르는 문학작품의 방향성도 가리킨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지만, ‘아무나’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들. 허투루 던져버리기 힘든 이야기들. 오랜 잔상으로 남아 보편적인 인간의 내면에 은밀하게 감춰진 그 무언가를 묵직하게 건드려서 스스로 질문하고 고뇌하고 답하게 만들 수 있는 이야기들. 문학작품만이 해낼 수 있는 고유한 특징을 나는 작품 속에서 최대한 살려내고 싶다. 이러한 면에서 게이고의 작품은 아쉽기만 하다. 가슴 따뜻해지고 진정성이 느껴지며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도배하고 있지만, 책을 다 읽고 허무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아무래도 작품이 가지는 얕음과 가벼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얕음과 가벼움은 ‘공감’이라는 참 아름다운 단어 밑에 바짝 붙어 기생하여 인간 본성의 깊이와 무거움을 은폐하고 100%가 아닌 50% 정도의 표면적인 진실만을 독자들이 대하게 하어 결국 본질을 놓쳐버리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적당한 진실은 진실을 은폐하는 법이다. 여기에서 조금 과장하자면, 본질이 빠진 그 자리를 대신하여 따스한 감동과 같은 피상적인 감상으로 예쁘장하게 덧칠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느낀 독자는 아마 나뿐만이 아닐 것이란 생각이다. 비슷하게 느꼈다 할지라도 이렇게 글로 적나라하게 써내는 사람은 아주 드물겠지만 말이다.
게이고의 작품은 시간 때우기용이 아니라면 더 읽어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주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대중성이라는 단어와 깊이와 무게에 대한 사유를 게이고 덕분에 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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