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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웅의책과일상

정유정 저, ‘28’을 읽고

가난한선비/과학자 2021. 6. 16. 08:07

창궐하고 사라지는 전염병, 끝까지 살아남는 인간의 본성.

정유정 저, ‘28’을 읽고.

이 작품은 화양이란 도시에서 28일 간 일어난 원인모를 에피데믹이자 인수공통전염병의 발단과 창궐을 주 배경으로 한다. 작품의 주인공 격인 서재형을 비롯한 몇몇 사람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사건, 사고를 통해 보편적인 인간의 심리와 본성을 파헤친다. 읽다 보면 언뜻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와 ‘눈뜬 자들의 도시’, 혹은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가 떠오르기도 한다.

경험이 전무한 에피데믹이 돌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마련이다. 만약 COVID-19처럼 원인이 바이러스인 경우, 백신 개발에는 병원체 파악, DNA 나 RNA의 염기서열 파악, 백신 디자인, 예비실험, 오류 수정, 여러 차례에 걸친 검증 절차, 백신 대량 생산 등에 시간이 수개월 (길게는 수년) 소요된다. 백신이 개발되기 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주 기본적인 것들, 이를테면 손 자주 씻기, 타인과의 접촉 줄이기, 마스크나 장갑 등 개인보호장비 착용하기 이외엔 없다. 감염률, 격리율, 사망률의 증가는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손실이다. 적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에 대항할 무기를 손에 쥐기 전에 희생자의 발생은 불가피한 것이다. 이 작품 속 에피데믹은 병원체가 무엇인지조차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많은 희생자와 사상자를 내고 종결에 이른다. 에피데믹의 발단과 종결의 과학적인 설명은 전무하다. 작가 정유정이 이러한 부분을 다루지 않은 건 아마도 전염병 자체가 아닌  전염병으로 인해 뜻하지 않게 야기된 인간 심리와 본성에 독자들이 더욱 집중하길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7년의 밤’에서 보여줬던 치밀한 서사, 그 안에 깃든 지독한 인간의 심리와 섬뜩하리만치 무서운 인간의 본성, 간결한 단문들의 휘몰아치는 연쇄는 그대로 유지된다. 독자들은 몰입하다 보면 빨라지는 호흡 때문에 문장을 미처 다 읽지도 않은 채 책장을 넘기게 될 것이다. 거대한 서사 가운데 팽팽하게 유지되는 긴장과 스릴은 과연 정유정 답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먼저, ‘7년의 밤’과는 달리 이 작품은 마지막 책장을 덮고도 무언가 끝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전염병은 28일 만에 종결되었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주요 이야기는 여전히 끝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등장인물의 절반 이상이 죽었다. 주인공 격인 서재형도 죽었다. 그러나 이들의 죽음도 소설의 결말의 미진함을 다 설명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무언가 한 끝이 모자란 것 같았다. 책의 중반에 들어서 살짝 긴장이 누그러지기도 하는데, 그건 아마도 정유정의 휘몰아치는 문체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음을 알려주는 듯했다. 또한, 결과 (혹은 미래)를 먼저 보여주고 원인 (혹은 과거)을 나중에 설명하는 식의 글쓰기 방식이 연거푸 반복되다 보니, 애초에 가졌던 호기심엔 약간의 짜증이 섞이기 시작했고, 친절하지 않은 글쓰기가 던져주는 신선함 대신 식상함이 그 자리를 메우기 시작했었다. 여러 인물들의 개별 서사에 대한 병렬적인 소개로 500페이지에 육박하는 장편을 채우기에는 아쉬운 감이 있었다. 그중 서재형의 개별 서사에 초점을 두긴 했지만, 과거 알래스카에서 경험했던 아이디타로드 (죽음의 개썰매 경주) 서사와 서재형의 현재와의 연결점이 묘연하게 보였고 개연성마저 떨어지는 것 같아 아쉬웠다. 굳이 좋게 해석해보자면, 정유정이 드러내고 싶었던 인간의 심리와 본성은 전염병처럼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아 조용히 잠식하고 있다가 기회를 틈타 언제든 고개를 쳐드는 속성을 가진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종의 기원’이라는 책이 책장에서 대기 중이다. ‘28’보다는 ‘7년의 밤’과 같은 맛을 내길 바라본다.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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