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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묘한 심리, 덤덤하고 섬세하고 우아한 필체


가즈오 이시구로 저, ‘나를 보내지 마’를 읽고


‘인간의 특별함’에 대한 통찰을 얻고자 두 번째로 펴 든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 읽기 전부터 개요는 알고 있었기에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이 작품을 읽는 사람들이 흔히 겪을 ‘놀라움’이 내겐 없었다. 인상 깊었던 부분은 따로 있었다. ‘장기 기증을 위해 만들어진 복제 인간들의 삶’이라는 기발한 공상과학적인 구도보다 나에겐 ‘가즈오 이시구로’라는 작가의 필체가 더 크고 묵직하게 다가왔다. 이제는 소설을 읽을 때 독자가 아닌 작가의 입장에서 읽게 된다. 하나둘씩, 아주 조금씩 저마다 다른 작가의 고유함과 탁월함을 조용히 관찰하고, 가능하다면 그것들을 흡수하려고 노력한다. ‘남아 있는 나날’, ‘클라라와 태양’으로 이미 두 번이나 만난 가즈오 이시구로로부터 나는 작가의 내공이랄까 하는, 자세히 읽지 않으면 좀처럼 발견하기 어려운 그 무언가를 겉보기엔 무덤덤한 필체로 쓰인 것 같은 이 작품 ‘나를 보내지 마’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떤 작가는 단 한 편의 작품만 읽어 봐도 감이 오는가 하면, 또 어떤 작가는 두세 편 읽어 봐야 제대로 감을 잡을 수가 있는데, 가즈오 이시구로는 철저히 후자에 속하는 작가였다. 사람도 처음 만날 때 다 파악되는 사람보다는 두세 번 만나면서 조금씩 진국이 드러나는 사람이 더 매력적인 법이다.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다가 책 뒤에 있는 옮긴이의 말에서 나는 답을 발견한 것 같았다. 옮긴이 김남주가 쓴 문장이었다. 아래에 옮겨본다. 


“의도적으로 나직하게 읊조리며 감정의 골목골목을 찬찬히 답파하는 그의 문장은 ‘그랬다’와 ‘그랬을 수도 있다’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독자에게 환기해 주는, 요컨대 뉘앙스에 주목하는 섬세한 어떤 것이다. 그러니까 작가는 사건이나 정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 정황에 관계하는 심리의 결을 고운 붓질로 드러내고자 한다. 그리하여 화자의 성격뿐 아니라 저자의 성격, 그리고 작품의 성격까지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성과를 거둔다. 오늘의 세계 문학을 이끌어 가는 우아함과 미묘함에 대해 알게 됐다는 독자의 고백을 저자에게 안겨 준, 우리가 왜 책을 읽는가 하는 물음에 값하는 작품이다.”


우아함과 미묘함. 심리의 결을 드러내는 고운 붓질. 나는 이것보다 내가 느낀 바를 더 잘 표현할 자신이 없다. 말문이 막혀 웅얼대는 사람에게 적절한 단어가 주어져 굳이 말할 필요를 못 느끼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이 작품은 언뜻 성장 소설로 읽힐 수 있다. 별다른 설명이나 뚜렷한 단서 없이 평범한 학교 생활이 책의 앞 절반 정도를 이루고 있으며, 동일한 등장인물들이 성인이 되어 살아가는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간중간에 아주 간접적인 단서들이 숨어 있는데, 아무것도 모른 채 무턱대고 성장 소설로 읽다가 그 단서를 만나게 되면 아마도 독자들은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재해석을 가해야만 하는 입장에 놓일지도 모르겠다. 설마 하는 호기심과 두려움이 반반씩 섞인 감정을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뜬금없이 눈앞에 닥친, 작지만 묵직한 단서 앞에 서게 될 때의 비장함을 떠올리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지도 모르겠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스토리텔링이 극적인 효과를 거두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이 구도를 위한 방법으로 이보다 더 효율적인 게 있었을까 싶다. 내가 보기에 가즈오 이시구로는 탁월하다.


그렇다. 주요 등장인물들은 모두 복제 인간이다. 그들이 태어난 이유는 단 하나. 장기 기증이다.  (‘기증’이라 써놓고 ‘탈취’ 혹은 ‘강탈’이라고 읽는다). 장기를 가장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는 장소가 바로 복제 인간 안이었던 것이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될 즈음이면 궁금한 게 하나둘 생겨난다. 이들 복제 인간의 존엄성은 무엇일까, 이들에겐 영혼이 존재할까, 이들의 존재 가치는 무엇일까, 등등의 일련의 물음들이 답 없이 나열되기 시작한다. 물론 모든 게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이기 때문에 현실성이라는 측면에선 터무니없이 거리가 멀지만, 철학적으로나 인문학적으로, 그리고 과학 윤리학적으로 충분히 깊게 생각해볼 만한 거리가 된다. 


이런 묵직한 주제에 더하여 나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필체에 반하게 되었는데, 조곤조곤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섬세한 기법과 특별한 것 없이 아주 일상적인 소재들로 사람의 미묘한 심리를 탁월하게 풀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감탄을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본성과 심리 하면 도스토예프스키를 제일 먼저 손꼽는 나로서 가즈오 이시구로의 색다른 표현 방법을 목도하곤 사실 조금 놀라워서 어안이 벙벙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가즈오 이시구로의 차이는 아마도 앞서 언급한 ‘미묘함’이라 생각한다. 그 미묘함이 가진 섬세함을 표현하기에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덤덤한 필체가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다. 뜻하지 않았던 곳에서 만난 행운이랄까. 아직 읽지 않은 그의 작품들이 선물로 여겨진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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