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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이고 또 사적이기도 한 에세이
황정은 저, ‘일기’를 읽고
지난 사흘간 드문드문 고요한 시간이 날 때마다 황정은의 첫 에세이집 ‘일기’를 조금씩 읽었다. 덕분에 내가 아는 일기와 에세이의 경계가 조금 흐릿해졌다. 일기는 사적인 (private) 이야기, 에세이는 개인적 (personal)이지만 사적이진 않은 이야기로 나는 이 둘을 구분해왔다. 일기는 공개하기 어렵고 공개할 필요도 없으며 애초부터 공개를 목적으로 써지는 글이 아니지만, 에세이는 공개성이라는 측면에선 개방된 글이라고 이해해왔다. 말하자면 일기는 자기 자신 이외엔 독자가 없는 반면, 에세이는 처음부터 공개되어 독자들에게 읽힐 목적을 암묵적으로 띠고 있는 글이다. 그래서 에세이에는 일기와는 달리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조건이 자연스레 붙게 된다.
제목을 일부러 ‘일기’라고 한 이유를 황정은은 ‘작가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어떤 날들의 기록이고 어떤 사람의 사사로운 기록이기도 해서, 그것이 궁금하지 않은 독자들이 잘 피해 갈 수 있도록 ‘일기’라는 제목을 붙여보았습니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 책과 함께 하는 내내 공개를 목적으로 써진 황정은의 에세이가 아닌 비공개를 조건으로 단 황정은의 일기를 읽는 것만 같은 비밀스러움을 느꼈다. 특히 후반부에 가선 누군가의 일기를 훔쳐본다는 기분 (죄책감이랄까)이 들기까지 했다. 그만큼 이 책에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넘어 사적인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는 것이다.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일들까지도.
나는 가만히 마음에 담기는 에세이를 읽고 나면 먹먹해지는 가슴을 안고 며칠 동안 그 기분에 취해 지내기도 하는데, 적어도 그 기분은 에세이를 쓴 작가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 드는 기분은 황정은이라는 한 사람에 대한 감정이 컸다. 그냥 안아주고 싶었다. 작은 위로가 될 수만 있다면, 조그만 응원이 될 수만 있다면, 하고 바랐다.
지울 수 없는 과거의 상처를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상처와 함께 살아가는 데는 익숙해졌지만, 문득 찾아오는 기억의 조각들로 인해 끝내 아물지 않는 흔적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러나 혼자 아파하고 그 상처를 만든 상대를 원망하는 데에 집중하지 않고 그와 비슷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누구보다 더 공감하고 함께 하려는 작은 사랑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사람들. 이 책 덕분에 황정은도 이들 가운데 하나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황정은이라는 한 개인을 넘어, 비록 소수이지만 각박한 세상 속에서도 여전히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로 시선을 옮길 수 있었다. 부디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유지하며 앞으로도 글을 계속 써주시길.
#창비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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