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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의 선별과 압축을 통해 다시 만나는 도스토예프스키

석영중 저,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을 읽고

마음 담아 읽었던 작품들을 하나씩 꺼내 보며 회상에 잠기는 시간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비밀의 방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또 하나의 은밀한 즐거움이다. 감동의 깊이와 세기는 배가되어 장기 기억으로 저장될 확률이 높아지게 된다. 감동의 각인,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깊은 만족감은 첫 방문이 아닌 재방문하는 성실한 자만이 취할 수 있는 소중한 열매다. 뿐만 아니다. 처음 읽을 때 느꼈던 감동을 복기하는 경험은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효과를 낸다. 반복, 심화의 효과도 있지만, 재발견의 기쁨도 있다. 처음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는 경험.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전율과 함께 예기치 않게 작품 전체까지 재조명하게 되어 작품을 보다 깊고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또한 재방문할 때에만 보이는 것들도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어떤 작품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증거는 어쩌면 재독의 유무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인할 수 없이 안타까운 부분도 존재한다. 밑줄까지 그으며 읽었던 아름다운 문장들도 인간의 망각을 이겨낼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아무리 기억하고 싶어도 작품의 상당 부분은 잊히기 마련이다. 재방문은 우리에게 만족과 전율만이 아닌 당황스러움, 나아가 허망함까지 선사해주는 것이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다 보면 망각은 자연스러운 친구가 되고, 가슴을 가득 채웠던 감동의 순간들은 안개처럼 사라져 급기야 읽기의 효율성과 유용성까지도 따지게 된다. ‘어떡하면 잘 기억할 수 있을까?’에서부터 ‘또 잊어버릴 텐데 읽어서 뭐하나?’ 싶은 생각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로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방문 (책의 경우는 재독, 영화의 경우는 재시청)은 결코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라고 나는 믿는다. 좋은 작품은 소장하고 싶어 지고, 또 읽고 싶어 지며, 다른 번역본이 존재한다면 그것까지도 읽고 싶어 진다. 가끔 뭘 읽을지 망설일 때나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 때면 이런 재방문은 언제나 마음 놓고 찾게 되는 안식처가 되어준다.  

좋아하는 작가와 그 작가의 작품들을 연구하고 해석한 2차 자료들은 재방문과 더불어 더욱 풍성한 작품의 이해를 돕는다. 특히 자신의 느낌이나 해석과 결이 같은 사람이 쓴 2차 자료는 한 번도 만난 적 없으나 만나면 마치 오래 알고 지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처럼 친숙한 반가움을 선사한다. 게다가 그 2차 자료를 쓴 사람이 학계로부터나 대중으로부터 대가로 공인된 사람이라면 그 책은 도무지 읽지 않을 방도가 없다. 이는 내가 석영중 교수가 쓴 도스토예프스키에 관련된 2차 자료들을 꾸준히 읽어나가는, 읽어나갈 수밖에 없는 일차적인 이유가 된다. 

2021년 올해는 도스토예프스키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다. 세계 각지에선 1821년 생인 도스토예프스키의 탄생을 저마다 다른 형태로 기념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을 출간했던 ‘열린책들’에서는 200주년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대표적인 5대 장편소설을 한 세트로 구성하여 발간했으며, 석영중 교수에 의해 두 권의 2차 자료가 출간되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 작품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이다. – 다른 한 권은 ‘도스토옙스키 깊이 읽기’인데 현재 책장에서 대기 중이다. 기대된다. Stay tune! –

이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모든 작품을 섭렵하고 연구한 석영중 교수가 선별한 200 장면과 그 장면들에 대한 석영중 교수의 다섯 문장 안팎의 짧은 해석과 통찰로 구성되어 있다. 중간중간에 삽화도 들어가 있고 여백이 많은 편이라 부담 없이 읽어나갈 수 있다. 200장면 선별 과정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워낙 방대하고 심오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에서 반 페이지나 한 페이지 정도밖에 안 되는 장면들을 골라낸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보인다. 그러나 석영중 교수는 그것을 해냈다. 물론 주관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선택이기 때문에 200장면이 누구에게나 명장면으로 동의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석영중 교수가 선별한 200장면을 하나씩 읽어나가다 보면 그 장면이 녹아든 작품이 자연스레 떠오르고 예전에 읽었던 감동과 전율을 다시 느낄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을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이 책은 도움이 된다. 대형마트 시식코너에서처럼 먹거리 상품을 한 입씩 조금 맛보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어떤 한 단어나 한 문장, 혹은 한 장면으로 마음이 동하여 그 작품 전체를 읽게 되는데, 이 책은 그런 목적으로 쓰이기에 부족함이 없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선별된 200장면보다는 그 아래에 달린 석영중 교수의 글이 나에겐 더 압권이었다. 대가의 안목과 오랜 연구로 압축된 진한 농도의 통찰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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