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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반음을 노래하다

가즈오 이시구로 저, ‘창백한 언덕 풍경’을 읽고

사사로움에서 미묘함을 잡아내어 과장하지 않고 감정의 반음을 이토록 절묘하게 표현해내는 작가가 또 있을까. 가즈오 이시구로의 글에 요즈음 푹 빠졌다. 무심한 것 같으면서도 치밀한 섬세함과 탁월한 절제미가 내재되어 있는 그의 글은 미풍처럼 스며들어 전체를 오롯이 감싼다. 반음이 내는 그 미묘한 느낌을 이렇게 산문으로 나타낼 수 있다니! 그 정교함에 나는 매 작품마다 혀를 내두른다. 글쓰기 선생이 한 명 더 생겼다.

‘창백한 언덕 풍경’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데뷔작이다. 1982년에 출간되었으니 그가 서른도 되기 전에 쓴 작품이다. 이 사실은 나를 한 번 더 놀라게 한다. 이십 대의 감성으로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니! 이 데뷔작을 시작으로 황혼을 나지막이 노래하는 그의 세 작품이 1989년까지 완성된다. 그는 ‘파리 리뷰’라는 잡지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이 세 작품, ‘창백한 언덕 풍경’,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그리고 ‘남아 있는 나날’에 대해 “같은 책을 세 번 썼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세 작품 모두 “한 개인이 불편한 기억과 어떻게 타협하는지” 그려 내려고 했고, 특히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와 ‘남아 있는 나날’ 둘 다에서 “직업적인 면에서 소모적인 삶을 산 한 인간을 탐구”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나는 ‘옮긴이의 말’에 나온 바로 위의 두  문장을 이해하고 싶었던 것 같다. 세 편을 모두 읽었다. 운명을 느낀 사람처럼. 그리고 이 데뷔작을 다 읽은 오늘 마침내 이해할 수 있었다.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전율이 돋았다.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해진다.

이 작품 역시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처럼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원자폭탄 투하 전후의 일본을 주 배경으로 한다. 화자인 에츠코는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분신이라도 되는 듯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영국으로 이주했다. 두 번의 결혼, 세 번의 이별. 작품 속 현재는 첫 번째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딸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두 번째 남편도 죽은 지 몇 년이 흐른 시점이다. 에츠코는 현재 혼자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번째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딸 니키가 적적하게 영국 시골에서 홀로 살고 있는 에츠코를 방문하게 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둘째 딸이 머문 짧은 기간 동안 산책하다가 우연히 마주친 장면, 어떤 한 여자아이가 그네를 타는 모습을 계기로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기억은 영국으로 이주하기 이전, 첫 번째 결혼을 하고 첫째 딸을 임신하고 있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기억 속의 주인공은 이혼한 첫 번째 남편도 아니고, 시아버지도 아니며, 자기 자신도 아니다. 사치코라는 여자와 그녀의 딸인 마리코가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이웃이었던 그들과 함께 했던, 그리고 아파트 창을 통해 창백한 언덕 풍경을 홀로 내다보던, 짧지만 강렬했던 순간으로 돌아가 에츠코는 깊은 상념에 잠긴다. 

전쟁으로 남편과 사별한 이후 사치코는 딸인 마리코를 위한 삶을 개척하려 했지만 그 노력은 표면적일 뿐, 결국엔 자기 자신의 삶을 이기적으로 추구하는 삶을 선택하게 된다. 그 당시 에츠코는 그런 사치코를 응원해주기는 했지만 공감할 수도 마음 깊이 이해할 수도 없었다. 마리코에게 가장 적당한 장소인 삼촌 댁으로 가기를 거부하는 사치코, 마리코가 싫어하는, 그러나 새로운 아빠가 될 수도 있는 술주정뱅이 미군 프랭크를 따라 미국으로 가기로 선택하는 사치코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그들과의 짧은 인연이 끝나고 정작 사치코의 계획을 실행한 건 그녀가 되었다. 단지 미국이 아닌 영국이었을 뿐 에츠코는 이혼 후 영국인이었던 두 번째 남편을 따라 첫째 딸 게이코가 행복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예감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행을 택했던 것이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영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게이코는 영국에서 자살로 생을 마쳤다. 이 작품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사치코와 마리코와 함께 했던 과거 회상은 궁극적으로 에츠코 자신의 삶을 되짚어보는 것이었던 셈이다. 아마도 그녀는 첫째 딸 게이코의 자살에서 말 못 할 죄책감을 평생 가슴에 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과거엔 공감도 이해도 하지 못했던 사치코의 이기적인 삶을, 그 모순된 삶을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스스로가 보란 듯 살아왔던 에츠코. 그녀의 상념이 가득한 회상은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먹먹하게 만든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말은 옳았다. 황혼의 3부작, ‘창백한 언덕 풍경’,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그리고 ‘남아 있는 나날’은 과거의 불편한 기억을 회상하며 자신이 원하진 않았으나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삶을 합리화하는 나약한 한 인간의 나지막한 읊조림인 것이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된다.

잔잔한 물결이 만드는 파동을 증폭시켜 그 안에 깃든 본질을 발려내고 전체를 조망하게 만드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글. 아직 나에겐 그의 작품이 네 편 남아 있다. 아껴서 읽어야겠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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