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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담아낸 목소리

가즈오 이시구로 저, ‘나의 20세기 저녁과 작은 전환점들’을 읽고
(2017년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집)

멜로디와 가사가 아무리 좋아도 적당한 목소리를 만나지 못하면 그 곡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같은 곡도 부르는 목소리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법이다. 편곡과 개사 역시 곡을 다른 느낌으로 들리게 할 수는 있지만 목소리만큼의 직접적이고 직관적이며 심금을 울리는 강력한 힘은 갖지 못한다. 우린 귀로는 멜로디와 가사를, 마음과 영혼으로는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어떤 노래를  들을 때 마음에 감동을 느끼는 것도 목소리의 힘이 크다. 누가 부르느냐, 즉 곡 자체보다는 가수, 다시 말해 목소리가 곡의 전달에 있어서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가사가 아닌 목소리에 집중한다. 텍스트로 된 가사가 아닌 다양하고 다채로운 목소리의 고유한 음색 (질)과 성량 (양)을 글로 담아낸다. 이것이 비밀이었다. 이것이 바로 가즈오 이시구로의 비법이었다. 정확한 문장을 고집하는 신형철의 글쓰기론으로는 도무지 가즈오 이시구로의 글쓰기를 설명할 수 없었던 이유다. 

그는 2017년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노래의 중간쯤 가수가 우리에게 자신의 가슴이 찢어진다고 토로하는 순간이 나옵니다. 그 감정 자체와,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몹시 애쓰지만 결국 굴복하고 마는 저항 사이의 긴장 때문에 그 순간은 거의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감동적입니다. ……|

이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 이 자리에서 제가 다른 많은 경우에도 가수들의 음색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랫말보다는 가수가 노래하는 방식에서 말입니다. 모두 알듯이 노래 속에서 사람의 목소리는 헤아릴 길 없이 복잡하게 뒤섞인 감정을 표현합니다. 여러 해에 걸쳐 구체적인 면에서 내 글쓰기는 여러 가수들, 특히 밥 딜런, ……, 의 영향을 받아 왔습니다. 그들의 목소리에서 뭔가를 포착하면서 나는 나 자신에게 중얼거렸습니다. “아, 그래, 이거야. 이게 내가 그 장면에서 포착하고자 했던 거야. 이것과 아주 비슷한 그 무엇이라고.” 내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가수의 목소리 속에는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겨누어야 하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

목소리는 곧 사람이다. 이성으로 좀처럼 포장할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자 깊은 영혼이 묻어 나오는 그 무엇이다. 그 시간 그 공간 특이적인 성질을 가지는 동시에 그 사람만의 고유한 특색도 담아낸다. 우리가 어떤 글을 읽고 말할 수 없이 묵직한 전율이나 울림을 느끼는 건 이성보다는 정서를 통해서다. 사람이란 존재 자체가 이성적이기보다는 정서에 호소하고 또 그것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가. 그러므로 가사가 아닌 목소리를 텍스트로 담아낸 글이야말로 좀처럼 쉽게 설명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가지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참고로 원제는 ‘My twentieth Century Evening and Other Small Breakthrough’인데, 한글 제목에서 Evening을 ‘저녁’으로 번역한 건 뭔가 어색하다. 20세기가 지는 시점, 그러니까 21세기를 맞이하기 직전의 시기를 의미하는 문학적인 수사로 읽는 게 자연스럽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글에 어울리게 ‘황혼’이나 ‘저물 무렵’ 정도로 번역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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