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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라는 거대한 숲을 훑어보기 위한 좋은 지도

석영중 저, ‘매핑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부제: 대문호의 공간을 다시 여행하다)

어떤 작품을 읽고 한 번 매료되면 그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읽고 싶어 진다. 독서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한두 명 이상 좋아하는 작가가 있기 마련이다. 그 작가의 작품들을 데이트하듯 하나둘씩 섭렵해나가는 즐거움은 오직 경험해본 자만이 아는 깊은 맛일 것이다. 나에게는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런 작가 중 하나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지난 2년 간 나에게 깊은 독서의 맛은 물론 인간 본성에 대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사유까지도 가능하게 해 준 스승이 되었다. 아직 읽지 못한 (이라 쓰고 ‘데이트가 끝나버릴까 봐 의도적으로 읽지 않은’이라 읽는다), 우리말로 번역된 그의 작품이 여전히 여러 편 남아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큰 다행으로 여겨질 수가 없다.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 그러니까 1차 자료를 섭렵해나가는 즐거움이 다분히 수직적이고 평면적이며 개인적인 뉘앙스를 풍긴다면, 그 작가를 오랫동안 깊이 연구한 분들의 2차 자료를 읽는 즐거움은 마치 책을 혼자 읽을 때보다 벗들과 함께 읽고 나눌 때에야 느낄 수 있는 풍성함과 같은 맛을 낸다. 나는 주로 1차 자료를 먼저 읽는다. 2차 자료를 시작점으로 하여 작가의 작품 세계를 여행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2차 자료를 쓴 저자의 관점 때문에 나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감상과 해석을 놓쳐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1차 자료를 어느 정도 읽고 나서, 비록 막연하더라도 작가에 대한 어떤 느낌이 생겼을 때 2차 자료를 접하게 되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보다 깊고 풍성한 해석이 자아내는, 수평적이고 입체적인 맛을 느낄 수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독서란 어떤 객관적인 사실이나 유익한 정보를 알아내는 게 아니라 작가와의 일대일 만남이 주요한 목적이라 믿는다. 신뢰하는 어떤 사람과 깊이 교제할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들, 이를테면 영감, 성찰, 성장, 성숙, 그리고 치유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독서를 통해 이러한 소중한 열매들을 따먹을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러시아 문학, 특별히 도스토예프스키 전문가로 석영중 교수를 빼놓을 수 없다. 단연 최고이지 않을까 한다. 석영중 교수가 쓴 도스토예프스키와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한 2차 자료만 해도 지금까지 5권이 넘게 출간되었다. 학술적인 논문이 아니라 대중의 눈에 맞춘 책들이기 때문에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은 사람이든 읽지 않은 사람이든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책들이다. 나 역시 생물학을 연구하는 한 사람으로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연구한 내용을, 그 좁고 깊은 내용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어 설명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안다. 수학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물리학을 충분하게 설명하려는 시도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어떤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마저도 재설명을 요하고, 그 설명을 하다 보면 또 다른 낯선 용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게 되는 식의 연쇄적인 난항을 성실하게 겪어내야만 비로소 그런 글이 탄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렵고 전문적인 내용을 쉽고 대중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어쩌면 한 분야를 깊이 연구하는 전문가들에게 가장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이번에 읽은 책 ‘매핑 도스토옙스키’ 역시 쉽고 재미있게 써진 글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 책이 써지는 과정도 쉽고 재미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일 것이다. 대중서를 집필하는 전문가들에게 감사와 존경을 담아 보낸다.

이 책은 나에겐 약 1년 전 읽은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이후 석영중 교수가 쓴 두 번째 2차 자료였다. 제목 ‘매핑 도스토옙스키’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책은 도스토예프스키와 그의 작품 세계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에 입문해보고 싶다면 나는 무엇보다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이 책을 시작점으로 하여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을 직접 읽어보기로 마음을 먹는 독자가 생긴다면 아마도 이 책은 소기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한 게 아닌가 싶다. 이 책은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커다란 숲을 훑어볼 수 있는 좋은 지도다. 

이 책이 갖는 장점은, 여기엔 석영중 교수가 책상에 앉아 연구한 도스토예프스키만이 아닌, 직접 몸으로 부딪히고 경험했던 도스토예프스키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것이다. 에필로그에서 밝히듯 그녀는 2015년부터 2018년까지 러시아와 카자흐스탄과 유럽에 아홉 차례 다녀오면서 도스토예프스키의 거의 모든 흔적을 답사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한 장소에서 그리 오래 살지 못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끊임없이 유랑했다. 덕분에 그가 단 몇 달이라도 거주했던 셋집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지금은 대부분이 도스토예프스키 기념관으로 바뀌어 있거나 그를 기념하기 위한 현판이나 동상이 설치되어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러시아가 자랑했고 자랑하고 자랑할 세계적인 대문호인 것이다. 석영중 교수의 여행 에세이 형식까지 갖추고 있어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도 마치 방대한 시공간을 여행한 느낌이었다. 사업차 가는 여행도 아니고, 휴가를 즐기기 위해 가는 여행도 아닌, 오로지 도스토예프스키를 기억하고 기념하고 느끼고 더 알기 위한 목적으로 이뤄진 여행. 수십 년간 도스토예프스키를 연구해온 석영중 교수에겐 얼마나 가슴 벅찬 나날들이었을지 제삼자인 내가 잠시만 생각해도 감격스럽다. 

석영중 교수는 이 책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모든 작품을 다루진 않는다. 어떤 작품은 간단하게 제목만 언급하거나 한두 문장으로 넘어가는가 하면, 또 어떤 작품은 몇 장에 걸쳐 비교적 상세하게 다룬다. 그러므로 이 책을 조금이나마 깊게 이해하고 싶다면, 혹은 석영중 교수의 감상과 해석을 보다 깊게 공감하고 싶다면, 도스토예프스키를 대표하는 다섯 편의 장편소설 (‘죄와 벌’, ‘백치’, ‘악령’, ‘미성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처녀작인 ‘가난한 사람들’, 시베리아 유형을 다녀온 이후 썼던 ‘죽음의 집의 기록’, 그리고 ‘지하로부터의 수기’, ‘노름꾼’, ‘작가 일기’ 등의 작품들을 읽고 이 책을 접하면 좋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작가 일기’를 제외하곤 모든 작품들은 읽어서 그런지 석영중 교수가 곳곳을 방문하며 남긴 짧은 감상들에 나는 공감을 더 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책 덕분에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두 번째 아내이자 그의 주요 작품들이 세상에 선보이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었을 인물인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도스토예프스카야가 쓴 회고록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도 읽고 싶어졌다. 도스토예프스키 바로 옆에서 살며 동반자가 되어주었던 그녀의 회고록을 읽는다면 또 다른 모습의 도스토예프스키를 만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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