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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이한 문장들로 이뤄진 결코 평이하지 않은 글

가즈오 이시구로 저, ‘우리가 고아였을 때’를 읽고

매료되었던 작가의 또 다른 면목을 확인할 수 있었던 작품. 이 작품으로 가즈오 이시구로를 처음 만났다면 과연 나는 그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조금은 낯선 인상을 받기도 했던 작품. 동시에,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 다섯 편, ‘남아 있는 나날’, ‘클라라와 태양’, '나를 보내지 마’,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창백한 언덕 풍경’을 읽고 충분히 그에 대한 검증이 끝난 후에 접하게 되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된 작품. 그러나 이전에 내가 읽은 다섯 편의 작품이 A+였다면, 이번 작품은 A- 정도로 여겨질 뿐, 여전히 A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나를 매혹시킨 가즈오 이시구로의 글쓰기는 여전히 이 작품 안에도 살아있고 나는 그것을 충분히 음미할 수 있었다. 독자의 눈이 아닌 작가의 눈으로 작품을 읽어내는 맛은 내겐 또 다른 즐거움이다.

평이한 문장들. 그러나 그 평이한 문장들이 모여 결코 평이하지 않은 글이 만들어진다. 이것이 가즈오 이시구로의 힘이다. 정확한 단어 선별과 구성으로 집을 짓듯 글을 짓는 신형철의 글쓰기론으로는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문장들. 언젠가부터 나에겐 낯설고 매혹적인 세계로 다가왔고, 덕분에 나는 또 다른 선생으로부터 글쓰기를 배우게 되었다. 고급스럽지도 화려하지도 않을뿐더러 예리하지도 정확하지도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의 문장들을 읽고 나면 나는 어느새 가랑비에 옷이 젖듯 어떤 우수에 온몸이 다 젖고 만다. 그리고 나는 한 사람의 숨겨진 정서를 묵직하게 건드리는 힘은 문장의 정확함이나 예리함이 아닌 문장과 문장 사이에 깃든 작가의 정서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작가와 독자의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소도 드러난 문장이 아닌 드러나지 않은 문장 사이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독특한 진정성을 맛보고 싶다면 나는 가즈오 이시구로를 권한다. 특히 황혼을 나지막이 노래한 세 작품, ‘창백한 언덕 풍경’,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그리고 ‘남아 있는 나날’을 먼저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러면 내가 지금 이렇게 내뱉는 독백이 무슨 말인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저 유명한 셜록 홈스의 배경이 된 영국 런던이 이 작품의 중심 배경 중 하나였기 때문일까. 가즈오 이시구로의 각 작품 속엔 주인공의 직업이 모두 다른데, 이 작품의 경우 조금은 엉뚱하게도 사설탐정이다. 주인공을 탐정으로 설정한 이유는 아무래도 그의 과거를 좇아 나서는 한 사람, 그렇게 하면서 과거에 묶일 수밖에 없는 한 인간의 심리를 그려내고 싶어서이지 않을까 하는 짐작을 해본다. 이 작품 역시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보편적인 정서를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언뜻 불완전하고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나서는 탐정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작품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가 연상되기도 한다. 또한, 제목에서도 쉽게 알 수 있듯, 상하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주인공 크리스토퍼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고아다. 그는 지인의 도움으로 부모 없이 영국으로 건너와 남은 학창 시절을 보내고 대학을 졸업하고 탐정이라는 직업으로 살아가게 된다. 부모의 생사는 작품 끝에 가서야 밝혀지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크리스토퍼는 부모의 생사를 모른 채 중년이 될 때까지 고아로서의 정체성으로 살아가게 된다. 나중에 부모의 생사를 알게 되고 나서도 그가 혼자라는 사실은 전혀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크리스토퍼는 평생을 고아로서 살아낸 인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탐정이면서 고아인 인물. 매듭지어지지 않은 과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홀로 거대한 음모와 시대 상황 (제2차 세계대전 전후가 이 작품의 시대 배경이다. 그러고 보면 가즈오 이시구로의 여러 작품이 그 전쟁을 배경으로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을 맞서서 싸워내는 인물. 현실성이나 역사성을 따지기보다 우리는 크리스토퍼의 마음과 눈에 주목해야 한다. 화려하고 도도하게 보이지만 뭇사람들로부터 암묵적으로 외면당하는 세라에 대한 크리스토퍼의 마음과 눈, 그리고 자신과 전혀 상관이 없는 고아 소녀 제니퍼를 양녀로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녀의 장래까지 아버지의 입장에서 신경 써주는 그의 마음과 눈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나지막이 읊조리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고아의 마음과 눈으로 본 세상과 타자, 그리고 그 가운데 존재하는 다른 고아들이 눈에 들어오고 마음에 담기게 될 것이다. 나아가, 어쩌면 우리 모두가 고아 처지에 놓인 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묻게 될지도 모른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가즈오 이시구로 읽기
1. 남아 있는 나날: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575920555786044
2. 클라라와 태양: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415671625144252
3. 나를 보내지 마: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479150188796395
4.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785763058135105
5. 창백한 언덕 풍경: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820726917972052
6. 우리가 고아였을 때: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86135771724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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