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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성과 불가능성 때문에 더욱 아름다운 추억, 그 기억의 파편들

(추억에 닿지 못하고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인간의 한계와 숙명에 대하여)

 

파트릭 모디아노 저,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를 읽고

 

지극히 사무적이고 지극히 무미건조한, 아무런 감정도 아무런 사람 냄새도 맡을 수 없는 차갑기만 한 장부. 누군가에겐 그토록 소중한 의미를 주는 반면, 또 누군가에겐 아무런 의미도 주지 않는, 단 한두 장만으로 만들어진 공식 서류. 여백이 대부분인 그 안은 성의 없는 글씨체로 타이핑된 문자들이 채우고 있다. 결코 많지 않은 글자와 숫자들. 그러나 한 사람의 인생, 혹은 한 가족의 인생이 그 제한된 수의 글자와 숫자들 안에 압축되어 있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수십 년에 이르는 세월이 농축되어 있다. 그래서 그 어느 서류보다도 깊은 무게를 지니는 장부. 지금은 사라지고 가족관계 증명서 등으로 대체된, 바로 ‘호적부’다.

 

두 번째로 만나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이 작품은 ‘호적부’라는 원제목을 가진다.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라는 번역본 제목은 파트릭 모디아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한 사람 (번역가 김화영 이리라. 그는 처음으로 파트릭 모디아노를 한국에 소개한 장본인이다)의 원제목에 대한 해석이다. 하나의 해석은 해석한 자의 관점을 반영하기에 해석 전의 어떤 대상이 가지는 본래의 의미를 축소시키는 법. 다 읽고 나니 ‘호적부’라는 원제목을 그대로 사용했으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것이 가진 단순하고도 형용할 수 없는 묵직한 의미를 있는 그대로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제목 때문에 끌려서 읽게 되는 작품이 아니라, 끝까지 읽고 나서야 비로소 제목을 이해하게 되는 작품이 가지는 매력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절대 놓칠 수 없는 소중한 즐거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라는 제목은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훌륭한 길잡이 역할을 해준다고 생각된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에서 느꼈던 파트릭 모디아노만의 고유한 스타일은 그보다 1년 먼저 출간되었던 이 작품 속에도 그대로, 아니 어쩌면 더 진하게 녹아있다. 읽는 도중 끊임없이 궁금해지는 작품. 다 읽고 나서도 무언가 놓친 게 있는 것 같아 그것을 찾기 위해 다시 책장을 뒤적이게 되는 작품. 하지만 그 시도가 매번 실패하고 마는 작품. 총 열다섯 장으로 이뤄진 이 작품은 장편소설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시간 순을 따르지도 않고, 그 역순을 따르지도 않으며, 액자 속 이야기로 구성되지도 않고, 연작 소설도 아니며, 심지어 ‘나’라는 주인공이 매 장마다 같은지 다른지조차 묘연한 작품이다. 그러나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라는 글귀를 등불로 삼아 이 작품을 비춰보면 비로소 기이하게만 느껴지는, 어쩌면 누군가에겐 어렵다거나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여겨지는, 마치 오래된 기억의 불완전한 파편과도 같은 각 장 사이의 연결점이 보인다. 바로 추억이다. 그 추억을 이루는 기억의 파편들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여느 장편을 대하듯 읽어나간다면 이 작품만이 가진 본연의 맛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중도하차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나 파트릭 모디아노의 매력을 제대로 느껴본, 혹은 느껴보고 싶은 독자라면 그 정수를 맛볼 수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에서의 주인공 직업은 탐정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 속 여러 (?) 주인공 역시 어떤 면에서는 모두 탐정들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어쩌면 정체가 묘연한 작품 속 주인공들은 바로 우리 자신을 대변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린 모두 본능적으로 불완전한 파편들만이 남은 과거의 기억을 되찾고 싶어 하며, 그것에서 향수를 느끼고, 때론 안정감을, 때론 과거의 망령에 다시금 사로잡히는 생생한 불안과 공포를 평생 살아가면서 경험하기 때문이다. 탐정이라서가 아니라 인간이라서 그런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바로 기억을 더듬고 추억에 잠기기도 하며, 비록 불완전하고 결코 완성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숙명처럼 누가 시키거나 부탁하지 않아도 스스로 계속해서 기억의 파편들을 수집해나가기 때문이다. 즉, 파트릭 모디아노만의 고유한 스타일은 보편적인 인간의 본성을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을 번역한 김화영의 해설처럼 파트릭 모디아노의 작품 스타일이 주는 매력은 아무래도 ‘유예’인 듯하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자연스럽게 궁금해지는 것들을 의도적으로 계속해서 보여주지 않는 방법, 즉 ‘끊임없이 유예되는 기대’가 바로 파트릭 모디아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 키워드가 아닌가 싶다. 이 때문에 작품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동시에 이 때문에 인간이 처한 숙명과 한계, 즉 불완전한 기억의 파편들을 수집하지만 결코 완성하지 못할 추억을 찾는, 이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을 과장이나 왜곡 없이 가만히 응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라캉은 기표는 기의에 닿지 못하고 끊임없이 미끄러진다고 했다. 어떤 의미가 기호로 표현될 수 있어도 결코 그 기호만으로는 궁극적인 의미의 전부를 드러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기억의 파편들을 찾아 나서는 이유도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숙명에 처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기원을 알 수 없고 실체를 알 수 없는 추억을 완성하고 싶어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숙명. 즉, 추억은 실체가 없을지도 모르는 것이고, 적어도 우리가 주워 담는 파편들로는 결코 완성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또 조각들을 찾아 나선다. 궁극의 추억에 닿으려고 애쓴다. 인간의 한계이자 숙명이다. 불완전성과 불가능성. 어쩌면 추억은 그래서 아름다운지도 모르겠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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