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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onologue

산책

가난한선비/과학자 2022. 3. 30. 07:38

산책

길을 걸었다. 쉬지 않고 두 시간 반을 걸었다. 늘 차로 지나다니던 길 사이에 산책로가 나 있었다. 이 근처에 2년 넘게 살면서 한 번도 못 봤던 길이었다. 아차 싶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아이에게 아침밥을 먹이고 학교에 데려다준 뒤 가볍게 차려입고 길을 나섰다. 구글 맵으로 거리를 측정해보니 7마일 남짓이었다. 산책로는 다른 산책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두 시간 정도 걷다 보니 왼쪽 발목부터 엉덩이까지 조금씩 아프기 시작했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걷지 않았으면 이럴까 싶었다. 매일 걸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건강은 효율이기보다는 무식한 실천이라는 생각을 한다.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인다는 철칙 이외의 영리한 자들이 고안해낸 간사한 샛길 같은 방법들은 일체 배제하기로 한다. 

배가 고팠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마침 한국 식당이 있어 들어갔다. 김치찌개와 제육볶음을 시켰다. 평소엔 거의 시키지 않는 메뉴였다. 몸을 움직여 땀을 흘리고 배가 고프니 이상하게도 어릴 적 집에서 먹던 밥이, 엄마가 해주던 그 지겹단 식단이 떠올랐던 것이다. 지겹더라도 반복된 그 무엇은 언제나 장기기억에 강한 것 같다. 우리는 그것을 향수라고 부른다. 강렬한 어느 한순간보다 강한 일상의 반복적 행위. 그것의 힘. 나는 이것들을 붙잡기로 한다. 이걸 살아내기로 한다.

음식을 시키고 자리에 앉아 물을 홀짝거리며 마시고 있었다. 앞쪽에 매달려 있는 커다란 모니터에서는 클럽에서나 나올 법한 경쾌하지만 촌스러운 배경음악과 함께 멋진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이슬란드였다. 입이 쩍 벌어지는 절경이었다. 갑자기 세상엔 내가 안 가본 곳이 너무 많다는, 이 뻔한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집 근처에 버젓이 존재하던 산책로도 2년 만에 발견한 내가 떠올라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어 더 한심하게 느껴졌다. 

아이슬란드 절경을 보며 이국적이라는 표현에 대해 생각했다. 이국은 존재하지만 이국적이라는 표현은 무슨 의미인가 하고. 적어도 그것은 이국의 그 무엇과는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나에게 생경한 것이면 무엇이나 이국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 즉 이국은 객관적이지만 이국적이라는 표현은 주관적인 것이다. 이국에 살면서도 나는 얼마 만에 이런 이국적인 풍경을 보는 건가 싶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거긴 과연 정겹기만 할까. 이국적이라는 느낌이 들면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고국에서 느끼는 이국적인 삶. 어쩌면 그 느낌이야말로 진정 ‘이국적’인 느낌이지 않을까. 나그네의 노마드 삶. 나는 이제 향수는 어디로부터 느끼게 될까.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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