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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 속에 빛난 고결함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악몽 같은 이야기’를 읽고
도스토예프스키 전작 읽기도 분량으로 따지자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호흡이 긴 장편을 선호하는 취향 덕에 그의 작품 중 장편을 먼저 다 읽고 이젠 중단편을 아쉬운 마음으로 조심스레 하나씩 까먹고 있다. 쉬이 없어질까 두려워 맛난 간식을 아껴먹으려는 아이처럼 나는 책장에 꽂힌, 의도적으로 아직 읽지 않은 도스토예프스키 작품들을 일주일에도 여러 번 손에 들었다 놨다를 반복한다. 이전엔 몰랐다. 독서도 즐겁지만 아끼는 것도 즐겁다는 것을.
대부분의 도스토예프스키 중단편들은 책 한 권에 여러 작품이 실려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특색을 감히 사랑하는 독자로서 나는 그의 작품 읽기에 익숙하다. 하지만 자연스레 빨라지는 속도에 그대로 내 몸을 맡기지는 않는다. 저항하며 천천히 읽으려고 노력한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읽는다는 건 단순히 텍스트 읽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믿기 때문이고, 한편으론 존경하는 작가에 대한 일종의 예의를 갖추는 것이라고도 믿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비평가가 될 필요까지는 없다. 작품과 작가의 배경을 따로 공부하는 분석가가 될 필요도 없다. 다만, 도스토예프스키 특유의 문체, 이를테면 신랄하게 비꼬기, 어이없을 정도로 어리석게 행동하기, 섬뜩할 정도로 추악해지기, 그 가운데 고결한 구원의 작은 등불을 잊지 않고 의미심장하게 상징적으로 그려놓기, 등을 대할 때면 일부러라도 천천히 읽어야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충분히 공감하고 상상하며 텍스트 사이에 써진 도스토예프스키의 입김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방법은 단 한 권을 읽더라도 여러 권을 읽은 듯한 효과를 내며, 작품의 재미를 떠나 작품이 가지는 여러 층위의 다양하고 다채로운 맛을 볼 수 있는 미각을 일깨운다. 나아가 작가의 사상을 대충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작가가 읽어주는 걸 듣는 듯한 단계로까지 나아갈 수도 있다. 독서는 공감각적이고, 그래야만 하며, 그래야 제대로 된 독서라고 말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상상력이 거세된 독서는 독서가 아니다. 특히 문학 영역에서의 읽기라면 더욱 그렇다. 줄거리는 쉽게 잊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남는 건 결국 그 당시 잠깐이라도 시행했던 공감각적인 경험의 흔적이다. 잊지 말자. 독서는 향유다. 그래야만 한다.
‘악몽 같은 이야기’는 중기 작품에 해당하는 단편소설이다. 기준에 따라 중편으로도 분류할 수 있겠지만, 어쨌거나 열린책들 판으로 100 페이지 채 되지 않는 짧은 분량이다. 지금까지 읽은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중 나에겐 가장 짧은 작품이었다. 앞으로는 더 짧은 여러 작품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만, 이 작품으로 그 첫 문을 연 셈이다. 나름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늘 긴 호흡으로 이루어진 이야기 전개와 수 페이지에 걸쳐 진행되는 장광설까지도 즐겼었는데, 이젠 상대적으로 짧은 호흡과 급박한 전개 혹은 간단한 설정 정도에 만족을 해야 하니 조금 아쉬운 감도 없진 않다. 마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전체 이야기 중 한 장면에 불과한 것 같은 느낌이랄까.
하지만 이 작품을 읽고 나서는 생각했던 것보단 걱정을 덜 해도 되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백 페이지도 되지 않는 짧은 분량의 작품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약 20분의 1 분량이다)에서도 도스토예프스키는 충분히 도스토예프스키다운 문체로 온통 도배를 해놨기 때문이다. 문학을 감상할 때 줄거리를 파악하거나 교훈을 얻기 위한 목적에서 벗어난 지 오래인지라 도스토예프스키의 문체를 조금은 새로운 설정에서 맛보는 경험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만족한다. 다만, 여전히 도스토예프스키는 장편에서 더 돋보이는 작가라는 게 내 지론이다.
이 작품은 염치를 모르는 것 같은 한 고관의 어이없는 해프닝을 그리고 있다. 짧은 분량 덕분인지 복잡하게 꼬이는 이야기도 없고 상대적으로 단순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대신 무엇을 말하려는가가 장편보다 압축적이고 뚜렷하게 드러난다. 상징적인 부분들도 여러 번 등장하며 설명을 대신하여 이야기 전개에 한몫을 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작품을 통해 의도적으로 시대상을 반영한 듯 보이는데, 정치와 사상에 관련된 부분, 특히 복고주의와 자유주의의 대립, 그리고 작품을 다 읽고 나서도 모순적으로만 보이는 ‘휴머니즘’이라는 개념 사용에 대한 풍자를 선보인다.
주인공은 스스로를 휴머니즘을 사랑하고 실천하며 복고주의자들에 대항하는 자유주의적인 사상을 가진, 나름대로 앞서간 인물이라고 여긴다. 시대가 자기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기도 할 정도로 자기애가 강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오래 유지되진 않는다. 대부분의 일상은 늘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며 거기에 맞춰 사는 비주체적인 캐릭터로 그려진다. 말하자면 ‘입진보’랄까. 남들 앞에서는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인 것처럼, 헌 것을 뜯어고치며 새로운 것을 향해 먼저 나아가는 선구자로 보이기를 갈망하지만, 그 모두가 허세에 지나지 않는 인물. 정작 그의 관심은 휴머니즘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이 대단한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하지도 않고 오직 자기만 대접받기를 바라면서 휴머니즘을 부르짖는 건 모순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는 휴머니즘을 실천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저 남들에게 휴머니스트로 보이고 싶어 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인생 자체가 허세에 쪄든 인물인 셈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런 인물의 성향을 직접적인 설명 대신 그가 어느 날 밤에 벌인 우스꽝스럽고 창피하기도 한 어떤 해프닝을 기획하고 실행에 옮기고 뒤처리를 하는 모습을 통해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언제나 말과 글보다는 직접 보여주는 게 효과가 큰 법이다. 소설의 힘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주인공은 자신이 얼마나 휴머니즘을 사랑하고 그렇게 사는 사람인지 보여주기 위해 밤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부하 직원의 결혼식 피로연에 늦은 시각에 참석하기로 맘 먹는다. 높은 직책의 대단하신 분이 한 달 월급이 10 루블밖에 되지 않는 하급 관리의 결혼식 피로연에 초대받지 않았는데도 참석하여 그 부하 직원을 축하해주고 살며시 나온다면 도덕적으로 고결함을 증명할 수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휴머니즘을 실천하며 인격적으로도 훌륭한 인물이라는 소문이 자자하게 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서 말이다. 그는 이런 어이없는 자신의 상상만으로도 들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그 터무니없는 계획을 실천에 옮기고야 마는데, 어지간한 독자들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아무도 그를 반기지 않았다. 파티 분위기는 망가졌고, 그는 결혼식 피로연의 주인공이 되어 버렸다. 신랑은 잔뜩 눌려서 꼼짝없이 수발을 들었다. 가난한 관리의 집에선 마시기 힘든 샴페인도 두 병이나 대접받으며 불청객처럼 그곳에 머물렀다.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우리의 주인공 고관 나리는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결과, 술에 취해 뭐라고 지껄이다가 쓰러져 잠들고야 마는데, 그 여파로 사람들은 다 흩어졌고 남은 신랑과 신부, 가족들은 그 고관을 아무 데나 재울 수 없기 때문에 새로 산 신랑 신부를 위한 침대에 눕히기로 결정한다. 신랑은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난감한 상황에 정신이 나갈 지경이 되었고, 신부는 울분이 터져 목청 높여 울기 시작한다. 신부의 어머니는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냐면서 신랑을 구박한 뒤 신부 손을 잡고 집을 나간다. 입이 턱 막히는 상황 전개. 비극적이고 또 한편으론 우스꽝스러운 광경. 아, 나는 '과연 도스토예프스키로구나!'라는 생각을 다시금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재앙 한가운데서도 유일하게 침착한 인물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신랑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술에 취해 사경을 헤매고 있는 고관을 밤새 침대 옆에서 돌보았고, 아침이 되어 씻으라며 물까지 준비해준 천사 같은 인물로 그려진다. 말하자면 구원의 빛 한 줄기로 이 작품 속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인물인 셈이다. 인간이라면 어찌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인내하고 용서하며 악을 선으로 갚는 고결함. 이 우스꽝스러움과 고결함의 극적인 대비. 역시 도스토예프스키구나, 싶어 나는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었다.
생각과 행동이 다르고, 남의 시선에 맞추어 사는 비주체적인 우리 주인공을 보고 있노라니 나는 내 주위에서도 몇몇 비슷한 사람들이 떠올랐다. 말로만 바르고, 말로만 앞서가고, 말로만 선한, 가식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악랄한 인간들. 분노가 살며시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신랑 어머니의 고결함이 그 분노를 눌러버렸다. 그것도 넉넉하게 말이다. 그녀를 생각하면 주인공 고관은 유아적인 망상에 사로잡힌 어리석은 인간 정도로, 그래서 분노해야 할 인물이 아닌 불쌍하게 여겨야 할 인물로 바뀐다. 이 놀라운 관점의 변화.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어야 할 이유는 이것 말고도 충분하다. 남은 여러 중단편들이 기대가 되는 이유다.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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