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해석과 믿음
“나는 인도를 받고 있다”는 말은 나의 믿음을 반영한다. 반면, “저 사람은 인도를 받고 있다”는 말은 나의 믿음이라기보다는 해석이라고 봐야 한다. 나의 현재를 바라보는 시선은 믿음일 수 있지만, 타자의 현재를 바라보는 시선은 믿음이 아닌 해석의 영역에 머무는 것이다.
한편, “나는 인도를 받았다”는 말이나 “저 사람은 인도를 받았다”는 말 역시 모두 믿음이라기보다는 해석이라고 봐야 한다. 믿음은 그 해석을 사실로 받아들일 때 요구되는 그다음 행위인 것 같다. 현재가 아닌 과거를 바라보는 시선에 있어서는 그것이 나의 과거든지 타자의 과거든지 상관없이 모두 해석이지만, 틀릴 수도 있는 해석의 틀릴 가능성을 제거해버리고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건 믿음의 영역인 것이다. 어쩌면 믿음은 여러 해석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고 남들이 뭐라 하든 그것에 가장 큰 가치를 부여하고 받아들이는 초월적인 행위일지도 모른다. 물론 반이성적인 믿음은 곤란하다. 하지만 믿음은 필연적으로 비이성적인 속성을 지닌다.
해석은 다양할 수 있다. 특정 해석이 다른 해석들보다 유력할 수도 있다. 정답이란 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틀릴 가능성을 전제한다. 믿음 또한 다양할 수 있다. 해석처럼 믿음도 주관적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론 틀릴 가능성을 전제한다. 그러나 믿음은 아무래도 하나의 해석에 치우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설사 타자의 눈에는 틀린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믿고 싶은 나의 욕망 (혹은 강한 바람)이 투영되기 때문이다. 믿음은 해석과는 달리 그것이 가지는 비이성적인 속성 때문에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는 영역의 일인 것이다.
그런 이유로 믿음은 해석에 비해 더 주관적이며 책임이 뒤따른다. 여러 해석 중 하나를 택한 논리적인 이유만이 아닌 본인의 가치관이 내재된 욕망이 발현된 실체이므로 믿음은 해석보다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은 자기가 선택한 해석에 자기 자신을 거는 행위라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믿음은 마치 그것이 진리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게 될 위험을 항상 담지하게 된다. 즉, 자신이 선택한 해석이 진리여야 한다는 강압적인 생각에 잠식될 여지가 생기게 된다. 이른바 믿음의 폭력성이다. 자신의 강한 믿음도 타자의 눈에는 그저 해석으로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절대 잊으면 안 되겠다.
해석과 믿음의 중요한 차이점은 그것이 누구를 향한 것이냐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주관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책임도 뒤따르고 사적인 욕망이 내재된 믿음이 타자를 향하게 될 때 이는 폭력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순수한 믿음일지라도 믿음은 타자를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니다. 믿음의 표현은 사적인 선을 넘어설 때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으면 좋겠다. 자신 있게, 소신 있게, 당당하게 자신의 믿음을 밝히면 그만이다. 남들이 그것을 뭐라 하든 초연한 자세를 견지할 필요가 있다. 믿음은 해석과는 달리 자기 자신과 동격으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행위보다는 존재에 가깝다. Doing 보다는 Being에 가깝다. 즉, 믿음은 해석이라는 행위를 존재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행위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in monologue'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양꼬치 (0) | 2022.09.10 |
|---|---|
| 일상에서 일상으로 (1) | 2022.09.10 |
| 나에서 타자로 방향 전환 (0) | 2022.08.20 |
| 여백 (0) | 2022.08.14 |
| 3찰 (관찰, 성찰, 통찰)의 순서 (0) | 2022.08.12 |
- Total
- Today
- Yesterda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