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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onologue

일상에서 일상으로

가난한선비/과학자 2022. 9. 10. 09:40

일상에서 일상으로

한국 들어온 지 세 달이 지났다. 숨통이 턱 막히던 찜통 같은 나날들이 어느새 저만치 물러가고, 한국엔 가을이 도둑 같이 잦아들었다. 태풍 힌남노가 한반도 동남부에 생채기를 남겼지만, 여기 대전은 장마 기간보다 비가 좀 더 많이 내렸고 바람이 좀 더 강하게 분 정도로 그쳤다. 태풍이 왔던 게 맞나, 싶을 정도였다. 선입견일 수도 있지만, 역시 충청도구나, 싶었다. 차지도 덥지도 않은 그 어딘가에 애매하게 위치한. 충청도 특유의 그 무엇.

요즘엔 일교차도 커 한낮 최고 기온은 약 30도를 육박하지만, 새벽녘엔 최저 15도 정도로 떨어진다. 해가 기울고 저녁 무렵이 되면,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과 드높은 파란 하늘이 특히 아름답게 느껴진다. 겨울을 예비하는 가을이 온 것이다. 추워지는 길목. 왠지 사색에 잠기기도 하고 살짝 우수에 젖기도 하는 계절. 나이가 들수록 가을이 더 좋아지는 것 같다.

세 달 동안 우린 서로에게 다시 익숙해졌다. 쉬울 것 같았지만 의외로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결핍이라는 게 생기면 인간은 그것을 메우려고 애쓰게 된다. 생존 모드라고 할까. 아마도 본능적인 행위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낯설지만 익숙해진 삶이 일상이 될 무렵이면 결핍은 더 이상 결핍이 아닌 일상의 한 조각이 된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결핍이 채워지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는 시기가 주어지면, 그동안 살아왔던 또 다른 일상은 다시 사라져야 할 그 무엇이 된다. 원래 익숙했던 일상과 익숙해지려고 애썼고 겨우 익숙해졌던 일상 사이에 묘한 괴리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떠남과 정착, 헤어짐과 만남은 우리네 인생을 이루는 큰 축이겠지만, 경험할 때마다 어렵고 낯설다. 언제나 시간이 필요한 문제인 것 같다. 마침내 만난 우리 셋은 그 시기를 잘 거쳐오고 있는 것 같아 참 다행이란 생각이다. 결국 상황과 상관없이 서로의 가슴 저 깊숙이 박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이 모든 과정을 견뎌내게 하는 것 같다.

나는 둘이 아닌 셋이서 보내는 시간과 공간을 즐기면서도 하루에 한두 시간 정도 혼자만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루틴이라 할 나의 일상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며칠 전엔 세 번째 저서가 될 가능성이 있는 초고를 완성하기도 했다. 일주일에 한 권 정도씩 꾸준히 읽어 나가는 평소 습관에도 다시 익숙해지게 되었다. 읽기와 쓰기는 이젠 떼려야 뗄 수 없는 내 삶의 한 조각이다.

과학을 하는 것도 여전히 즐겁다. 훌륭한 인재들과 함께 하는 연구소 생활은 기대가 많이 된다. 동료들의 나이를 보면 여전히 나 자신이 아직 빠지지 않은 똥차 같은 존재인 것 같다는 자조적인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까진 내 지식과 기술과 경험이 쓸 만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있고, 그것들을 아낌없이 나누면 동료들에게 충분히 큰 힘이 될 수 있지 않나 싶다. 똥차가 아니라 도우미 혹은 길잡이의 존재로 거듭나는 시기. 내가 여기 한국에서 담당해야 할 사역이 아닌가 한다.

오늘 퇴근하면 다음 주 월요일까지 이어지는 긴 추석 연휴가 시작된다. 나도 오랜만에 명절이라는 이유로 부모님을 찾아 뵐 것이다. 미국에 있을 때 언제나 조바심이 나던 것 중 하나는 한국에서 걸려오는 전화였다. 부모님을 한국에 두고 계시는 미국 거주 한인들은 아마 같은 마음일 것이다. 어느 날 걸려올지도 모르는 부모님의 건강 상태에 대한 불청객 같은 전화 한 통. 그것은 부모님의 죽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기에 언제나 두려운 것이다. 이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불효를 한다는 생각에 나 역시 언제나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이젠 한국에 있으니 그 염려에서 해방된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시는 부모님을 자주 찾아 뵐 생각이다. 용돈도 드리기 시작했다. 내 노후보다는 현재 살아 계신 부모님을 위하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찾아 뵈면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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