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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 햇살에 비친 일상의 긴 그림자


가즈오 이시구로 저, ‘녹턴’을 읽고


비록 나지막하지만, 다섯 편으로 구성된 이 작은 단편집에서 선명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는 단 하나다. 다섯 내러티브, 다섯 내레이터, 그리고 한 명의 작가. 이 엄연한 사실을 주지하기라도 하듯, 다섯 편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음색과 같은 톤으로 채색되어 있다. 바로 내가 사랑하는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목소리다. 묻히기 쉬운, 마치 읊조리는 듯한 그의 작은 목소리를 알아챈다는 것은 곧 이 작품을 제대로 읽어낸다는 말과 같은 의미라 생각한다. 그렇다. 가즈오 이시구로를 읽는다는 건 평범한 일상에 녹아든, 그러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우수가 깃든, 세미한 음성에 귀 기울일 줄 안다는 것이다.


나의 가즈오 이시구로 전집 읽기의 마지막 정거장인 이 작품은 부제에서도 밝히고 있듯 ‘음악과 황혼에 대한 다섯 가지 이야기’이다. 때론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을 통해, 때론 노래하는 사람, 때론 음악 감상을 사랑하는 사람의 입을 통해 들려지는 다섯 가지 이야기는 모두 그들의 평범한 일상을 비춘다.


특히 내레이터가 음악가인 경우, 이야기는 무대 위가 아닌 무대 아래의 삶을 조명한다. 여기서 무대 아래의 삶이란 쉬는 시간이라든지 휴일의 삶을 말하는 게 아니다. 무대 위에 오를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음악인들, 다시 말해 유명인의 대열에 끼지 못한, 성공하지 못했거나 이미 그 시기를 놓쳐버린 음악인들의 일상을 통칭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하여 이름을 알린 음악인보다는 그렇지 않은 음악인들이 현실에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사실을 전제할 때, 이 작품은 대부분의 음악인의 현실적인 일상을 조명한다고 볼 수 있다. 무명 음악인의 평범한 일상의 단면을 정오의 강한 햇빛이 아닌, 비스듬히 비치는 늦은 오후의 햇살로 조명한다고나 할까. 그로 인해 생기는 긴 그림자는 작품을 읽고 난 이후에 남는 여운이 된다.


각 단편은 이렇다 할 위기나 사건의 부재 위에서 잔잔하게 진행된다. 비루하다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훌륭하다거나 특별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삶. 그럭저럭 생계를 유지하고는 있어 특별한 어려움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정적이라거나 행복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삶. 충만함이나 성취감보다는 결핍과 공허가 일상을 가득 메우는 삶. 차라리 형편없는 실력의 음악인이었더라면 그들의 빈자리는 그렇게 크지는 않았으리라. 차라리 그들에게 여전히 젊음이 허락되었더라면 그들의 여백엔 적어도 우수가 깃들진 않았으리라.


절반도 남지 않은 인생을 꾸역꾸역 살아내고 있는 음악인들. 한때 꿈이었던 삶을 뒤로하고, 여전히 미련을 가슴 한 편에 간직한 채 그 삶 근처에서 맴돌며 살아가고 있는 음악인들. 왜 나는 그들의 삶에서 내 인생을 읽어내고 아파하며 가슴 깊이 공감하게 되는 걸까. 왜 나는 어느덧 마흔 중반에 접어든 내 나이를 곱씹으며 텅 빈 공간을 응시하게 되는 걸까.


밋밋하지만 그게 바로 내 삶의 현주소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러면 나는 조금은 우수에 차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묵묵히 일상을 살아내는 그들을 향해 마음 담아 응원하게 된다. 무대 아래야말로 일상을 이루는 베이스캠프이며, 내가 나와 동지와 세상과 연대하는 곳 또한 다름 아닌 바로 이곳, 나의 허름한 일상임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견딤의 미학 가운데 성실히 오늘을 살아내는 모든 이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격려를 보낸다. 동지들아, 화이팅.


*가즈오 이시구로 읽기
1. 남아 있는 나날: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575920555786044
2. 클라라와 태양: https://www.facebook.com/youngwoon.../posts/4415671625144252
3. 나를 보내지 마: https://www.facebook.com/youngwoon.../posts/4479150188796395
4.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https://www.facebook.com/youngwoon.../posts/4785763058135105
5. 창백한 언덕 풍경: https://www.facebook.com/youngwoon.../posts/4820726917972052
6. 우리가 고아였을 때: https://www.facebook.com/youngwoon.../posts/4861357717242305
7. 나의 20세기 저녁과 작은 전환점들: https://www.facebook.com/youngwoon.../posts/4880748465303230
8.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5014351918609550
9. 파묻힌 거인: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5329154997129239
10. 녹턴: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pfbid02jyHWozUkFrWBvw7xWjhwET5aqxQKJWHHQV2vmiyZVo224SzgQuk8b3VFdhCqx69al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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