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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와 쓰기

초고

가난한선비/과학자 2022. 9. 6. 21:28

초고

지난 주말, 나의 세 번째 저서에 해당하는 초고를 완성해서 출판사 대표님에게 보냈다. 책의 컨셉을 직접 전해 듣고 이해했다고 생각한 뒤로 대략 2주 만의 일이다.

갑자기 글이 써지거나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가 있다. 안타깝게도 이런 순간은 자주 오지 않는다. 왔다고 해도 알아채지 못할 때가 많다. 알아챘다고 해서 그 순간을 좀처럼 기회로 만들어 내지도 못한다. 여러 단계를 거쳐야만 하고, 또 여러 상황이 맞아 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구원이 언제나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처럼, 이런 순간도 글을 쓰는 사람에겐 일종의 구원과도 같은 순간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순간이 지난 주말 나에게 찾아왔던 것이다.

일주일에 걸쳐 고심하며 책의 컨셉에 부합한다고 생각하는 프롤로그를 썼다. 그랬더니 책을 어떻게 구성해야 할지에 대한 설계도가 떠올랐던 것이다. 마치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아니, 그려졌던 그림이 마침내 보였다고 해야 할까. 누군가가 그렸던 그림을 비로소 보게 되었다고 하면 과장이 너무 심한 걸까. 희미했던 선들이 선명하게 보이는 듯한 경험. 신기했다.

우선 내가 썼던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글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예전에 쓰고 공개했던 글들, 공개하지 않았던 글들을 모아 수정을 가했다. 모은 글들을 찬찬히 읽어보다가 미흡한 것 같으면 새로 글을 써 넣었다. 그리고 다시 전체를 읽어보다가 뺄 건 빼고 줄일 건 줄이고 추가할 건 추가했다. 그랬더니 딱 원하는 두께의 책 한 권 분량이 나왔다.

살짝 전율이 느껴졌다. 첫 번째 책이나 두 번째 책의 대부분도 이런 경험을 통해 써졌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에필로그를 쓰며 나름대로 마침표를 찍는 듯한 기분까지 느꼈다. 무언가 완성된 것 같은 느낌. 신기하게도 그 느낌은 무언가를 성취했다는 느낌이라기보다는 흩어졌던 퍼즐을 맞춰 큰 그림을 완성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그 정리되는 듯한 느낌이 좋았다.

초고는 초고일 뿐이다. 이게 얼마나 받아들여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초고가 초고의 모습 그대로 출판될 리는 없다. 나 같은 무명 작가는 특히 더 그럴 것이다. 절반 이상을 바꿔야 할 수도 있고, 통째로 다 새로 써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언가 정리된 것 같은 느낌이 너무나 강했고, 모든 글을 새로 쓰지 않는 한 현재로선 이보다 더 잘 구성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일단 마무리를 짓고 출판사 대표님에게 초고라는 이름으로 보내드렸던 것이다.

만약 세 번째 책이 출판된다면, 과연 이 초고 버전이 얼마나 살아있을지 몹시 궁금하다. 향후 출판사와의 소통 중에 어떤 변화가 주어질지, 그 과정 중에 또 무엇을 더 배울 수 있을지, 어떤 시너지 효과가 날 수 있을지 기대된다. 책 한 권 더 내고 싶은 마음보다는 좋은 책을 내는 데 일조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강하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좀 더 준비된 작가로 거듭나길 소망하게 된다. 이런 기회를 허락해주신 출판사 대표님께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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