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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onologue

기억되는 건 내용이 아닌 행위

가난한선비/과학자 2023. 2. 1. 07:20

기억되는 건 내용이 아닌 행위

버스가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기다리거나 앉아 가는 동안엔 휴대폰 메모장에 뭔가를 끄적일 수 있다. 하지만 서서 가는 동안엔 넘어지지 않게 몸의 균형을 잡고 창밖을 바라보는 일밖엔 딱히 할 게 없다.

그때 나는 생각에 잠긴다. 조금은 외롭고 쓸쓸하다는 기분도 함께 느낀다. 그리고 어느새 나는 중고등학생 때나 대학생 때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다니던 시절의 나로 돌아간다.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대학 1학년 땐 삐삐가 있었다), 나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갖은 생각에 잠겼던가. 특정한 생각, 이를테면 창의적인 생각 같은 건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쌓이고 쌓인 그 숱한 시간들은 나의 잠재의식과 무의식 저변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떡 하니 자리 잡고 있었나 보다. 며칠간 버스를 타면서 이 낯설고도 익숙한 느낌이 무엇일까 했었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그 정체를 알게 되었다. 아, 나는 이 느낌이 좋다. 반가운 기분이다. 풋풋했던 과거의 나와 만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한 여자의 남편도 한 아이의 아빠도 아니었다. 그저 한 부모의 아들이었고 평범하고 가난한 집안에서 공부 하나 좀 잘했던 풋내기 학생일 뿐이었다. 그때 나는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과연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 이 질문을 하며 나는 오늘 아침에 했던 생각도 기억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무엇을 생각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렇게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던 내 모습이 오래토록 기억될 뿐이다. 마찬가지다. 내가 지금 무엇을 쓰고 있는지는 기억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는 것, 글을 쓰는 내 모습은 기억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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