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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onologue

기억의 한 조각

가난한선비/과학자 2023. 4. 10. 09:45

기억의 한 조각

한적한 공간, 여유 있는 시간, 쫓기지 않는 마음만 있다면 그 순간은 추억이 된다. 비가 그치고 온도가 다소 내려갔지만 하늘은 다시 푸른색을 선보인 날, 우린 석 달만에 부모님을 찾아뵈었다.

이번엔 차를 끌고 다녀왔다. 예전엔 기차를 이용했었는데 시간은 물론 비용까지 운전하는 편이 더 나았기 때문이다. 우린 고속도로를 타고 휴게소에 들러 통감자와 맥반석 오징어와 커피를 즐기는 루틴도 잊지 않았다. 아들 녀석은 딸기 우유를 마셨다.

부모님과 포항으로 가면서 차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억의 이해할 수 없음에 대해서. 크고 중요한 일이 기억에 남는 게 아니라 어이없을 만큼 사소한 일들, 이를테면 프루스트 효과처럼 어떤 맛과 향, 혹은 멍 때리고 있을 때 지나쳤던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나무와 전봇대 같은 것들이 기억의 방으로 들어가는 문이 된다는 것. 대화를 나눈 뒤 혼자서 조용히 기도했다. 오늘 이 순간도 그 문이 되기를.

탁 트인 동해 바다가 보이는 공원의 한 구석, 엉뚱하게만 보이는 곳에 설치된, 마치 미국에 다시 온 것만 같은 기분까지 들었던,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커다란 그네. 나는 힘껏 아들의 등을 밀었고, 아들은 하늘을 잠시 날았다.


오랜만에 들른 죽도시장에서 회와 게를 마음껏 먹었다. 스키다시보다 회를 집중적으로 공략할 수 있는 시장의 장점을 십분 활용할 수 있었던 곳.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회가 가득 큰 쟁반을 메우고 있었다. 한 점 한 점 보기 좋게, 몇 점인지 셀 수 있고, 한 점 먹기가 눈치 보이는 도시 속의 고급진 횟집과는 차원이 다른 곳. 몸도 마음도 넉넉해지는 순간이었다. 오는 길엔 대전에서는 좀처럼 맛볼 수 없는 청송 사과를 한 박스 사왔다.

두세 달에 한 번씩 꼭 찾아뵈어야겠다. 더 늦기 전에, 더 후회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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