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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onologue

여유와 지혜

가난한선비/과학자 2023. 5. 14. 22:54

여유와 지혜

무언가를 쉬지 않고 채워 넣는 일에 희열을 느끼던 나도 이젠 나도 모르게 손에 움켜쥐고 있던 무언가를 하나둘 내려놓는 일에서 마음의 평안을 찾는다. 하고 싶은 일보다 하기 싫더라도 해야만 하는 일들이 언젠가부터 많아졌고, 나는 그것들을 처리하며 참 많이도 불평과 불만을 해댔던 것 같다. 잘 키워온 배지가 어느 순간 오염되어 버리는 것처럼 내 인생도 그렇게 의무감만으로 잠식되어 간다고 믿었다. 다행히도 그 믿음은 나를 구원해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 믿음은 구원받기 위해 가장 먼저 버려져야 할 그 무엇이었다. 나는 내게 주어진 거룩한 일상을 거부하는 일을 사명이라 여겼던 철부지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적당한 체념은 마음과 몸을 가볍게 한다. 이때의 체념은 일종의 포기이지만, 멈추거나 후퇴시키는 게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인생의 낮은 점을 지난 사람들은 그러기 전보다 더 작은 캔버스를 고르기 마련인데, 그건 주눅이 들거나 겁을 먹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제야 자기에게 맞는 사이즈의 캔버스를 골랐기 때문이다. 자기 객관화가 안 된 욕심꾸러기의 거침없는 전진은 사막 한가운데에서 곧 연료가 바닥날 자동차와 같다. 마주하게 되는 건 곧 파멸일 뿐이다.

지혜는 채우는 게 아니라 버리는 데에서 온다고 나는 믿는다. 인생 전반전에서의 여유는 타고날 수도 있지만, 후반전에서의 여유는 본인이 직접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때의 여유는 지혜의 산물이다. 눈이 깊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선물이다. 버리면서 비로소 채워지는 그 충만한 여유. 그 여백. 이제야 내가 아닌 타자와 세상이 보이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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