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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웅의책과일상

장 그르니에 저, ‘섬’을 읽고

가난한선비/과학자 2023. 6. 25. 10:21

무위의 역설

장 그르니에 저, ‘섬’을 읽고

엄밀한 의미에서 보자면, 일부러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은 무위가 아니다. 무언가를 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그 삶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삶이 곧 무위의 삶이다. 요컨대, 거스르는 삶이 아닌 흘러가는 삶, 의도나 목적을 내려놓는 삶, ‘채워있음’보다는 ‘비어있음’이 어울리는 삶이 무위의 삶이다. ‘무위의 삶’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르니에의 ‘섬’을 읽으며 나는 활자화된 사유와 삶이 순리에 따라 흘러간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 작품을 번역한 김화영의 글은 옳다. 나도 ‘목적 없이 읽고 싶은 한두 페이지를 발견하기 위하여 수많은 책들을 꺼내서 쌓기만 하는 고독한 밤을 아는 어떤 사람들’ 중 하나이며, ‘지식을 넓히거나 지혜를 얻거나 교훈을 찾는 따위의 목적들마저 잠재워지는 고요한 시간, 우리가 막연히 읽고 싶은 글, 천천히 되풀이하여, 그리고 문득 몽상에 잠기기도 하면서, 다시 읽고 싶은 글’ 중 하나가 ‘섬’이기 때문이다. 나는 ‘무위의 삶’ 안에 있는 ‘무위의 역설’을 믿는다. 무위가 유위가 되는 순간, 침묵이 말이 되는 순간, 비어있음이 채워있음이 되는 순간을 언제나 고대한다. 그르니에의 ‘섬’을 읽는 시간이 내겐 바로 그런 순간이다.

뒤늦게 독서를 막 시작했을 무렵, 그르니에의 ‘섬’을 추천받았다. 다 읽지 못하고 중간에서 책을 덮었다. 그때의 나는 무위의 역설을 모르던 나였기 때문이다. 목적을 이루고자, 문제를 해결하고자 책을 읽던 나였기 때문이다. 그르니에의 글은 의도가 충만한 자의 눈에는 읽히지도 발견되지도 않는 것이다. 한국에 와서 다시 구입한 ‘섬’을 읽고 나는 마치 처음 이 책을 읽는 듯한 기분이었다. 약 7년이란 세월이 내 눈을 뜨게 해 준 모양이다. 앞으로도 이 책은 여러 번 더 읽게 될 것 같다. 미처 공감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 글들과 행간이 마침내 읽히게 될 그날이 기대된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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