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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시스템에서 생명의 시스템으로

월터 브루그만 저, ‘안식일은 저항이다’를 읽고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은 안식일은 저항이라고 주장한다. 무엇에 대한 저항인가. 불안과 강요와 배타주의와 과중한 일에 대한 저항, 아니 이 모든 것들을 생산해 내는, 아니 생산해 낼 수밖에 없는 ‘죽음의 시스템’에 대한 저항이다. 브루그만은 안식일이 저항인 이유를 ‘안식일이 상품 생산과 소비가 우리 삶을 좌지우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강조해 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끝없는 욕망, 끝없는 생산, 끝없는 노동을 요구하는 물질주의, 즉 맘몬의 방식은 이미 우리 삶에 팽배해 있으며, 진보나 보수를 막론하고 우리는 모두 ‘파라오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다고 진단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쉼으로 들어가는 것이 절박하면서도 어려운 것이다. 브루그만은 계속해서 말한다. 늘 불안에 떨며 더 많은 벽돌을 찍어 내려고 애쓰는 삶을 잠시라도 멈추면, 우리가 지는 짐은 가벼워지고 우리에게 지워진 멍에는 쉬워진다고. 그리고 예전과 같이 지금도 얼마든지 다른 삶을 즐기며 구가할 수 있다고. 요컨대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와 무한경쟁체제로 돌입한 물질만능주의, 상품지상주의에 저항하라는 것이다. 이는 곧 구약의 안식일 정신을 지금, 여기에서 회복하는 일이다.  


앞서 언급했듯, 브루그만은 우리가 저항해야 할 ‘죽음의 시스템’의 모델을 출애굽 이전의 ‘파라오 시스템’에서 찾는다. 이 시스템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은 생산에 도움이 되지 않는 부모나 동포를 천대할 수밖에 없고, 다른 이들이 위협이 되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폭력에 가담할 수밖에 없으며,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 성관계를 상대를 학대하는 상품으로 전락시킬 수밖에 없다. 또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갖고 있으면 그것을 강탈할 수밖에 없고, 이익을 얻으려고 왜곡과 말 돌려하기에 빠질 수밖에 없으며, 탐욕에 헌신할 수밖에 없다. 파라오 시스템에는 불안과 강요와 배타주의와 과중한 일이 일상이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위협과 경쟁자만이 있을 뿐 이웃이 없었다. 그러나 야훼가 내리신 명령에는 파라오의 명령과 달리 사회에서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 가운데 이웃이 들어 있고, 이웃끼리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 유지를 대담하게 염두에 두고 있다. 하나님의 이 기이한 요구는 이웃에게 쏟는 사랑으로 불안만을 야기하는 생산성 중심 풍조에 맞서라는 것이었다. 안식일의 핵심은 쉼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쉬셨듯, 우리도 쉴 수 있다. 아니, 쉬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가 쉴 때에는 우리 주위 이웃들도 쉴 수 있고, 또 쉬어야만 한다. 불안만을 야기하는 파라오 시스템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저항의 시스템은 곧 하나님의 안식일, 즉 쉼의 시스템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죽음의 시스템에 붙잡힐 필요가 없다. 그것으로부터 해방받고 구원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스스로 그 시스템에 붙잡혀 노예가 되어버렸다.


안식일은 단순한 쉼이나 단순한 멈춤을 넘어선다. 안식일은 강요와 경쟁에서 벗어나 서로를 긍휼히 여기는 연대성에 비추어 사회의 모든 삶을 재고해 보는 계기가 된다. 즉 안식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동적인 혹은 피동적인 멈춤이 아니라 변화를 일으키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멈춤이다. 이스라엘이,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안식일에 멈추고 쉴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이미 주어졌기 때문이다. 파라오의 시스템에서 해방받고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은 그것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다. 탐욕의 지옥에서 살아갈 필요가 없다.


출애굽기와 신명기를 지나 훨씬 더 후대의 본문인 이사야 56장에 의하면, 이스라엘 공동체의 구성원 자격을 논하며 모세의 옛 율법과 어긋나는 조치를 취하며 모세의 율법을 뒤집어엎기 시작한다. 배타주의를 거부하고 포용주의 원리를 강조한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공동체의 구성원임을 나타내는 유일무이한 표지가 되었다. 여기에서 정결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다만 사람다움을 지키도록 이웃과 더불어 일을 멈추고 쉬는 것만 언급한다. 일을 멈추라는 이 명령은 모든 사람이 지킬 수 있다. 동성애자, 여자, 남자, 흑인, 백인, 아메리카 원주민, 히스패닉을 막론하고 누구나 다 안식일을 지킬 수 있으며,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모이는 자리에 모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안식일은 구성원이 될 ‘자격이 있다’는 개념을 부숴 버린다. 배타주의를 거부하는 것이다. 브루그만은 여기서 덧붙인다. ‘선한 열매’는 안식일이 안겨 주는 평화를 누리는 것에서 생겨난다고 감히 생각한다고. 나 역시 동의한다. 피 묻은 피라미드 시스템에서 선한 것이 나올 리가 없다.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으려면 안식일이 있어야 한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예전과 같이 돌아갔다. 모양은 다르지만, 다시 상품지상주의가 주가 되는 죽음의 시스템으로 복귀했다. 이는 이집트에서 건져내 주신 하나님을 잊고 그들이 그들 자신을 지킬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는 뜻이고, 더 많이 갖는 것이 행복을 만들어 내리라는 확신으로 돌아갔다는 뜻이다. 이집트 노예 때와는 달리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을 표면적으로는 지키면서도 상품을 획득하려는 탐욕을 여전히 버리지 않았다. 안식일을 지키는 행위는 껍데기일 뿐이었다. 그 이면에는 불안을 야기하고 강요와 착취를 일삼는 행위가 그치지 않은 채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이 탐욕스러운 행위에는 불안과 강요과 착취라는 원동력이 있었고, 이것은 안식일 속으로 곧장 침투하여 안식일을 무너뜨려버렸다. 쉼을 누리는 위대한 축제는 말 그대로 쉼을 없애는 또 하나의 원인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여기서 우린 알 수 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육 간의 쉼을 누리는 마음과 생각과 실천에 있다는 것을. 


무엇보다 쉼이 없는 안식일은 인간 안에 내재된 탐욕의 패턴을 그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탐욕은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기에 그것이 그치지 않은 예배는 신실한 예배일 수 없었다. 이웃을 긍휼히 여기고 정의를 행하도록 이끌지 못하는 예배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제사는 엉터리 안식일일 뿐이었다. 아모스는 모든 이가 쉼을 누리는 안식일을 거부하는 사회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까지 말했다. 이렇게 변질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행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기서 브루그만은 말한다. “하나님과 깊은 사랑을 나눈다는 사람이 내내 시계만 들여다본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예수를 찬송한다는 자가 가난한 이들을 잡아먹는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동시다중 작업을 하면서 여기저기에 마음이 팔여 있다는 것은 진정 일을 그치고 쉬지 않는다는 말이요, 성공하려고 미친 듯이 날뛰는 것을 그만두지 않는다는 말이다. 탐욕에 빠져 무언가를 얻으려고 일하면서 동시에 인간다운 소통을 나누어 보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상품지상주의로 돌아감을 보여주는 진정한 표지다.” 나 역시 전적으로 공감한다. 


십계명 전체와 연관 지어 안식일을 지키는 행위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나는 아멘을 외치고 말았다. 브루그만은 탐심을 경계하는 열째 계명을 안식일을 지키라는 넷째 계명의 맥락 속에 놓고 탐욕이라는 죽음의 순환 고리를 끊어 버릴 방법을 고려한다. 골로새서 3장 5절 말씀은 이를 대변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우상숭배와 탐심이 동일시되는 이유는 이 둘 모두가 실체를 살 수 있는 상품으로 전락시키기 때문이라고 한다. 안식일은 상품을 예배하는 행위를 거부하는 것이자 상품을 추구하는 행위까지 거부하는 것이다. 강력하고 죽음의 시스템에 전복적인 저항이 아닐 수 없다. 


브루그만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안식일은 탐욕의 힘을 깨뜨릴 실제적 바탕이자 탐욕을 제한하는 데 강조점을 두고자 하는 공중의 의지를 만들어 낼 실제적 바탕이라고. 안식일은 불안을 물리치는 해독제라고. 안식일은 우리가 소유가 아니라 선물로 산다는 것을 인정하는 마당이요, 우리가 상품을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는 신실한 관계에서 만족을 얻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마당이라고. 그리고 그는 안식일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아시는 우리 아버지 앞에서, 아버지가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취하며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파라오 시스템이 인간의 쉼 없는 탐욕이 바탕이 된 죽음의 시스템이라면 하나님의 안식일 시스템은 그것으로부터의 저항이자 대안이며 생명의 시스템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브루그만은 안식일이 우상숭배와 탐심에 초점을 맞추는 거짓 욕구들을 폭로하고 비판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문장을 다음과 같이 해석해 본다. 우리의 번지르르한 욕구들이 거짓인지 모르는 이유는 쉼을 가져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안식일의 정신을 지키며 삶에서 쉼을 가져보는 것은 단순히 안식일을 지키는 행위를 실천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 안에 어떤 탐욕이 자리하고 있는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을 수 있는 가장 훌륭하고 쉬운 방법이라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말도 나는 이를 기반으로 재해석하게 된다. 그리고 깊은 감사를 하게 된다. 안식일의 의미를 지금, 여기에서도 늘 되새기고 그 정신을 실제 일상에서 살아내자고 다짐하게 된다. 


#복있는사람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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