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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눈을 빌려 통찰해낸 그리스도인의 내면
C. S. 루이스 저,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읽고
나의 첫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도 ‘나니아 연대기’도 아니었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였다. 감상문을 쓰기 훨씬 이전,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이름 없는 무리에 속해 아무 생각 없이 교회를 들락거리며 그 안의 문화를 탐방하고 즐기고 있을 시기에 누군가가 권해줘서 읽었던 몇 안 되는 책 중 하나였다. 누가 권해줬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이 책만은 기억에 남았다. 단지 고참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신참 악마 (웜우드)에게 쓴 편지 형식이 선보이는 신선함 때문만이 아니라, 악마의 시선으로 인간의 심리와 본성을 고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약 20년이 흘렀다. 나는 40대 중반의 아저씨가 되었다.
인상 깊었던 책을 재독할 때 느낄 수 있는 감동은 그 깊이와 너비가 처음과는 다르기 마련이다. 초독과 재독의 차이는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공감할 수 없는 그 무엇에 속한다. 작품이 달라져서가 아니라 그 작품을 읽는 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초독과 재독의 차이는 그러므로 나의 성장, 성숙, 혹은 변화로 수렴된다.
약 20년의 세월을 살아오며 나의 신앙은 과연 얼마나 성장, 성숙했을까. 초등학생 (그 당시 언어로는 국민학생) 3학년 때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입었던 기독교의 옷을 나는 대학 1학년 때 거의 1년간 벗어버린 적이 있었다. 그해 말, 어떤 예기치 못한 만남이 주어졌고, 마음에 묵직한 이끌림이 있어 나는 다시 교인이 되었다. 그로부터 미국 가기 전까지의 내 신앙은 두 번째 신앙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여정의 정점이었던 20대 중후반, 나는 이 책 덕분에 루이스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나의 첫 저서 ‘과학자의 신앙공부’에서도 썼지만, 지금 현재 나의 신앙은 세 번째 여정에 속한다. 아무런 배경도 도움도 없던 미국에서 나는 처음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처절하게 인생의 낮은 점을 경험했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중심으로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하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까불어대고 있겠지만, 그 낮은 점을 통과하며 나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었다. 숱한 말들을 꺼내어 놓을 수 있겠으나, 단 한 문장으로 이 시기의 열매를 표현하자면, ‘이해하지 못해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 이후 나는 뿌리 깊은 의심에서 완전히 해방되었고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지금도 수많은 의심이 기반이 된 질문과 함께 신앙 생활을 해나가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적인 수준에 머물거나 그동안 내가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단면을 하나 더 알아간다는 의미일뿐 ‘그리스도인’을 나는 당당하게 나의 정체성 중 하나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추잡하게 주절거린 것 같다. 여하튼 이 작품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의 초독과 재독 사이의 기간은 숫자로 따지면 약 20년에 해당되지만, 질적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기 이전과 이후로 표현할 수 있다. 가치관, 세계관의 전환을 경험하거나 마침내 깊은 우물 밖으로 빠져나온 자의 눈은 다르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 작품을 어떻게 얼마나 다르게 읽어냈을까.
실망스러울지 모르겠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어 보인다. 초독 때 느꼈던 낯섦과 놀라움은 약간 줄어든 반면 (재독이므로 당연한 결과이리라), 루이스의 치밀하고 정확한 표현의 탁월함에 감탄하는 정도는 더 커진 것 같다. 아마도 이는 인생과 신앙에서 거대한 변화를 겪어낸 나의 변화 만큼일 것이다. 인생과 신앙 생활에서 나는 사람들의 비열함과 비굴함과 비겁함을 보고 경험했으며, 거짓과 위선과 자기 합리화의 추함도 보고 경험했다. 20대 땐 전혀 몰랐거나, 알아도 표면적인 수준밖엔 알지 못할 것들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한 가지 좋은 점은 인간에 대한 헛된 기대를 접을 수 있다는 것, 다른 말로 하자면 인간의 한계를 조금 더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되는 것이지 않을까. 그리고 이를 다르게 표현하자면, 스크루테이프가 간파해 낸 인간 내면의 심리와 본성에 대한 묘사를 별 거리낌 없이 맞장구칠 정도로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스크루테이프의 진단과 통찰 중 밑줄 그은 부분이 많으나 몇 가지만 짚어 보면서 이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1. 현재 우리의 가장 큰 협력자 중 하나는 바로 교회다.
>>> 초독 때는 깊이 공감할 수 없던 문장이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젠 그럴 수 있다.
2. 내가 맡은 환자 중에는 아내나 아들의 영혼을 이해서는 열렬한 기도를 쏟아 놓다가도, 진짜 아내나 아들에게는 기도하던 그 자리에서 곧바로 욕설과 폭력을 서슴지 않는, 무척 길이 잘 든 인간들이 있었다.
>>> 도무지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나조차 빠져나갈 수 없는, 부끄럽지만 너무나 진실인 인간의 이중성. 영과 육을 이분법으로 구분하는 작자치고 행함이 깃든 믿음을 가진 자를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들의 신앙은 이론적이고 관념적이다.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판사 역할을 자처한다. 정죄와 비난의 눈으로 자기가 아닌 모든 사람을 바라본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자들이 악마가 원하는 이상형 중 하나라는 루이스의 통찰에 나는 깊이 공감한다.
3. 제일 좋은 방법은 매일 만나는 이웃들에게는 악의를 품게 하면서, 멀리 떨어져 있는 미지의 사람들에게는 선의를 갖게 하는 것이지. 그러면 악의는 완전히 실제적인 게 되고, 선의는 주로 상상의 차원에 머무르게 되거든.
>>>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지적으로 가장 뛰어났던 이반 카라마조프의 신앙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인류를 사랑할 마음은 있지만, 주위에 있는 한 이웃을 사랑할 마음은 없는, 이론적이고 관념적인 사랑. 사랑이란 내가 아닌 남을 향하며 서로를 성장시키고 서로를 살리는 기적 같은 힘일진대, 이러한 사랑은 자기 자신만 사랑하는 나르시시즘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자기 자신을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자기애의 거울상일 것이다. 루이스도 동일한 지점을 통찰해낸 것 같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웃 사랑은 인류라는 거창한 개념이 아닌 한 사람이라는 실천 가능한 대상에게 하는 마음과 행위일 것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도 이러한 것이었다.
4. 어떻게 해서든 세상을 목적으로 만들고 믿음을 수단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면 환자를 다 잡은 거나 마찬가지지.
>>> 세상과 믿음을 목적과 수단 관계로 여기는 교인들이 허다하게 널려 있다는 점은 나도 지난 20년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들에게 만약 그리스도나 기독교보다 자기 목적을 성취하는 데에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이라도 존재한다면 그들은 큰 갈등 없이 그것을 선택해버릴 것이다. 믿음이 수단으로 존재하는 한 그 믿음은 믿음이라 할 수 없다.
5. 원수가 인간 영혼 하나를 제 것으로 확보하기 위해 꼭대기보다 골짜기에 더 의존한다는 걸 알면 아마 좀 놀랄 게다. 원수가 특히 아끼는 인간들은 그 누구보다 길고도 깊은 골짜기를 통과해야 했다.
>>> 은근히 위로가 되는 통찰이 아닐 수 없다. 꼭대기나 골짜기라는 개념 역시 한낱 인간의 눈에서 정의내린 것이겠지만, 그리스도인 역시 비그리스도인과 마찬가지로 이 두 가지를 모두 통과하는 인생을 살아간다는 점을 감안할 때, 우리의 믿음을 시험할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는 곳은 꼭대기보다 골짜기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된다. 나 역시 골짜기를 지나오며 세 번째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다. 두 번째, 세 번째 여정을 가르는 지점은 꼭대기가 아닌 골짜기였다. 다만 나는 스크루테이프가 원수라고 부르는 하나님께 쓰임받는 삶을 살고 싶다.
6. 쾌락은 감소시키고 그에 대한 갈망은 증대시키는 게 우리가 쓰는 방식이야.
>>> 쾌락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쾌락주의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 배후에 악마가 있다고 해도 나는 전혀 놀라지 않을 것이다. 쾌락을 감소시키고 그에 대한 갈망만을 증대시키는 방법은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 채 그것을 얻기 위해 인생을 거는 무모함을 낳을 수 있을 것이다. 끝없는 탐욕에 빠진 인간의 실체를 다시 직시하게 된다.
7. 환자는 이른바 주변의 두 세계를 다 포용하는 완전하고도 균형잡힌 복합적 인간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이처럼 최소한 두 집단의 인간들을 끊임없이 배신하면서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내심 자기만족에 취하게 된다 이 말씀이지.
>>> 미국에서도 보았다. 불신자들을 위해 교회 문턱을 낮춘답시고 그리스도 이야기를 빼고 교회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역할들을 축소시키는 행위들을 말이다. 이러한 맥락과 비슷한 것이 바로 맘몬의 파라오 시스템과 야훼의 시스템을 동시에 섬길 수 있다고 믿는 행태, 나아가 그렇게 겸비하는 것이 마치 균형잡히고 성숙한 신앙인인 것처럼 사람들의 생각을 조장하는 행태다.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그 두 주인은 바로 하나님과 맘몬이다.
8. 여하튼 행동으로 옮기는 것만 아니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게 두거라. 상상과 감정이 아무리 경건해도 의지와 연결되지 않는 한 해로울 게 없다. 적극적인 습관은 반복할수록 강화되지만, 수동적 습관은 반복할수록 약화되는 법이거든. 느끼기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질수록, 점점 더 행동할 수 없게 될 뿐 아니라 결국에는 느낄 수도 없게 되지.
>>> 행함이 없는 믿음은 반쪽 믿음, 아니 가짜라고 했다. 즉, 진짜 믿음은 행함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바른 생각, 바른 믿음은 행함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내가 악마라도 행함을 거세시킨 독실한(?) 믿음을 부추길 것이다. 진짜를 제거하는 방법보다는 가짜를 퍼뜨리는 편이 훨씬 더 사탄의 왕국 건설엔 효율적일 테니까.
9. 우리의 임무는 인간을 영원과 현재로부터 떠나게 만드는 것이다.
>>> 하나님의 형상 닮은 우리 인간은 영원에 속해 있는 영적 존재이자 육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 숨 쉬고 있는 유한한 존재다. 이 모순된 정체성이 가장 잘 발휘되는 시간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다. 하나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 임하는 것이다. 과거에 묶여 현재를 과거의 연장으로 삼아 현재를 망치게 만들거나, 미래를 준비한답시고 현재를 땔감으로 사용하며 현재를 가치 없게 만드는 방법. 우리의 시선을 현재가 아닌 과거와 미래에 묶어두는 방법. 곧 하나님 나라를 누리지 못하게 만들고, 우리의 신앙을 관념적으로 만드는 사탄의 고도의 전략일 것이다.
10. 비이기주의자들 사이의 의견 충돌은 제 뜻을 고집하느라 생긴 게 아니라 거꾸로 상대편의 뜻을 고집하느라 생긴 것이거든. 만약 처음부터 각자 자기 뜻을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면 이성과 예의라는 테두리를 지킬 수 있었을 테다. 환자의 영혼을 확보하려면 소소한 진짜 이기주의보다는 정교하면서도 자의식이 강한 비이기주의의 초기 징후들이 결국엔 더 값진 결과를 낳는 경우가 많다.
>>> 이기주의자보다 더 이기적인 비이기주의자의 행태를 이용해 먹는 방법 역시 사탄의 고도의 전략일 것이다. 이는 거짓말쟁이보다 거짓 겸손을 떠는 자가 더 악질인 논리와 일맥상통할 것이다. 놀라운 것은 독실한 기독교인 중에서도 이런 비이기주의자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위장과 위선에 능한, 양의 탈을 쓴 늑대들에겐 저주가.... 아니 그들에게도 주님의 은혜가 임하길.
11. 풍요로운 중년기를 보내는 인간은 세상에서 내 자리를 찾았다고 생각하지. 사실은 세상이 자기 속에서 자리를 찾은 것인데도 말이야. 갈수록 높아지는 명성, 넓어지는 교제권, 나는 중요인물이라는 의식, 열중할 수 있는 즐거운 일의 가중되는 압력 등은 이 땅이야말로 편안히 안주할 수 있는 고향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데,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원하는 바다.
>>> 정착과 떠남의 무한반복을 살아가는 나그네 삶이 세상 속 그리스도인의 현주소라고 믿는다. 중년이 되고 경제가 청년 때보다 안정적이 되면서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잊어버리게 된다. 하나님, 안정을 빙자한 정착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잊는 우를 범하지 않게 하소서.
* 루이스 읽기
1. 예기치 않은 기쁨: https://rtmodel.tistory.com/682
2. 고통의 문제: https://rtmodel.tistory.com/695
3. 헤아려 본 슬픔: https://rtmodel.tistory.com/699
4.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https://rtmodel.tistory.com/822
5. 천국과 지옥의 이혼: https://rtmodel.tistory.com/852
6. 순전한 기독교: https://rtmodel.tistory.com/911
7. 시편 사색: https://rtmodel.tistory.com/942
8. 순례자의 귀향: https://rtmodel.tistory.com/1164
9. 순전한 그리스도인 (by 김진혁): https://rtmodel.tistory.com/1176
10. 세상의 마지막 밤: https://rtmodel.tistory.com/1629
11. 침묵의 행성 밖에서: https://rtmodel.tistory.com/1633
12. 루이스가 메리에게: https://rtmodel.tistory.com/1635
13. 페렐란드라: https://rtmodel.tistory.com/1637
14. 개인기도: https://rtmodel.tistory.com/1653
15.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https://rtmodel.tistory.com/1658
#홍성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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