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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faith

감사가 족쇄로

가난한선비/과학자 2023. 12. 10. 18:29

감사가 족쇄로

은혜를 입은 사람은 그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 이전과 다른 입장을 보일 수밖에 없다. 생명을 구해줄 만큼의 큰 은혜라면 감사의 크기 역시 커진다. 사람이라면 당연한 반응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감사는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은혜 베푼 사람을 향한 적의가 조금씩 생겨난다. 이상한 말이라 생각하겠지만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구원 받았던 순간의 기억은 찰나가 되고, 은혜를 꼭 갚겠다는 의지는 희미해진다. 그 의지에서 감사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부담감이 자리잡는다. 어느새 은혜를 갚는 일은 남은 인생의 족쇄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탈출하고 싶을 만큼, 나아가 차라리 그때 구원의 손길을 거절했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펴면서 말이다.

인간의 한계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핵심을 엿볼 수 있는 것 같다. 은혜를 입고 난 다음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고찰해볼 수 있는 중요한 영감을 얻는다. 한 순간의 감사가 영원한 감사가 될 수 있도록 자신의 삶을 조율해나가는 것. 이것은 은혜를 입었던 과거를 기억하는 행위를 거뜬히 넘어선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행위만으로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 이치와도 같다. 방점은 일상에 있다. 말하자면, 은혜 입은 자를 넘어 은혜 배푸는 자로 거듭나기. 이것은 우리가 구원을 얻은 복음이 생명이라는 말을 잘 설명해준다. 신앙의 발생은 성숙을 거치며 죽는 날까지 길 위에서 계속 열매를 맺게 되어 있는 것이다. 완성은 없다. 멈추면 죽는다. 은혜는 고이지 않고 흘려보내야 하는 이유 역시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이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인도를 받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은 수동태가 아닌 능동태의 역동적인 행위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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