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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와 쓰기

천천히 달궈지는 책

가난한선비/과학자 2024. 1. 12. 08:29

천천히 달궈지는 책

책 종류를 나눌 수 있는 방법은 여러가지다. 여기선 빨리 흥미를 유발하여 몰입하게 만드는 책, 그리고 천천히 달궈지지만 정말 훌륭한 책이라고 고백하게 되는 책, 이렇게 두 종류로 나눠보겠다.

빨리 재미를 느껴 책장이 국수 말아먹듯 넘어가는 책 중, 적어도 천 권 넘게 여러 장르를 골고루 읽은 나 같은 경우는, 오래 남는 책이 없었다. 내가 무인도에 들고 갈 책 몇 권, 아니 몇십 권을 꼽으라고 해도 나는 그런 책은 고를 마음이 추호도 없다.

반면, 인생을 바꿀 정도로 큰 영향을 끼친 책들은 한결같이, 소위 첫 눈에 어렵게 보이는 책들이었다. 재미로 읽는다고 결코 말할 수 없는 책들, 이를테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나 ‘악령’, 헤세의 ‘유리알 유희’,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자서전’, 토마스 만의 ‘마의 산’,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등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너무 유명해서 들어만 보고 읽지는 못한 책들일 것이다. 겸손을 가장한 교만한 인간들이 언제나 이런 책들은 자기가 수준이 안 되어 못 읽는다고 거짓말을 하곤 하는 책들.

이런 책들은 초반에 천천히 읽어야 한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아마도 바로 이 부분일 것이다. 읽으려고 수차례 시도했다가 매번 포기하고 마는 시점 말이다. 핑계도 매번 같다. 어렵다는 것.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과연 어려운 걸까? 혹시 어렵다고 해야 스스로를 보호하고 합리화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진득하게 앉아서 책장을 천천히 넘기며 책의 내용과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려고 애써본 적이 있는가를 먼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책을 읽는 주체인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객체인 책을 함부로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이것이 책을 읽는 중요한 자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런 자세를 버리지 못한 상태에서도 흥미를 유발시키는 책들이 있다면 그런 건 안 읽어도 무방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믿고 걸러도 되는 책들이다. 세상에 읽을 책이 얼마나 많은데!

첫 문장만 읽고, 혹은 몇 페이지 읽지도 않고 그 책을 쉽게 판단해 버리는 사람은 경솔하다. 그런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말자. 우르르 여론에 휩쓸려서, 많이 팔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옆집 철수도 영희도 읽는다는 이유만으로 책을 읽지 말자. 보통 베스트셀러는 잘 팔리기 때문에 베스트셀러일 뿐이다. 좋은 책일 필요가 없다. 많이 팔린다고 하니까 많이 구입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바보 같은 흐름에 소중한 몸과 마음과 돈과 시간을 허비하지 말자. 대신, 누군가의 말에 너무 의지하지 말고 자신이 판단해서 읽어나가도록 해보자. 보석 같은 책은 보통 대중의 입에 쉽게 오르내리지 않는다. 천천히 달궈지는 책들을 도전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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