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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가 하나님의 창조 과정으로 사용되었다고 믿는 그리스도인 생물학자의 신앙공부와 신앙고백


보름 전에 올린 서평 하나가 예상보다 큰 파장을 일으킨 것 같아 얼떨떨했습니다. 페친 신청만 해도 백 번 넘게 받았고 (그중 열 명 남짓 페친이 되었습니다), 팔로우도 이백 명 넘게 생겼습니다. 페북 이래 처음 겪는 일이었습니다. 페북 인플루언서가 된 것마냥 우쭐한 기분도 아주 잠시 들더군요.


아마도 제 글 자체 때문이 아니라 제 글이 첨예한 이슈를 건드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십여 년 전부터 봐 오던 지긋지긋한 논쟁들과 다툼들로 페북 여기저기서 시끄럽더군요. 강산이 바뀌어도 한치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을 보며 저는 긴 한 숨을 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우종학 교수님을 비롯한 과신대의 활동 덕분에 평균적인 인식의 변화가 온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적어도 창조과학자들이 이젠 공개석상에서 떳떳하게 큰소리를 치진 못하게 되었으니까요.


이제 소란이 어느 정도 잦아든 것 같아 고백 하나 할까 합니다. 저 역시 창조과학을 대학 때 처음 접하고 사막의 오아시스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답니다. 완전 매료되었었죠. 그래서 저는 여러 종의 DNA 염기서열을 비교하며 진화 개념이 동반되는 부분을 공부할 때면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눈 앞에 떡 하니 보이는 염기서열의 동일성과 유사성을 모른 척하려고도 했었답니다. 마치 저는 그 DNA 염기서열을 보고 있는 것이 후미에를 밟는 행위와 비슷하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신앙은 목숨을 걸어서라도 배신할 수 없는 것이었죠. 목이 칼이 들어와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정말 ‘순수한’ 마음이었지요 (나중에는 순수함이 아닌 무지몽매함이라는 걸 깨닫게 되지만요). 

 

마우스와 사람의 유전자 염기서열이 90퍼센트 이상 같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아니 감히 마우스 따위가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 닮은 사람과 비슷할 수 있다는 것인지 저는 답을 알지 못한 채 혼자서 끙끙댔답니다. 그러다가 과학자의 양심상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결심을 내리게 됩니다. 과학의 본질이랄까, 특성이랄까 하는 중립적인 결과를 사실 그대로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내포하는 의미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걸로 일관했습니다. 어느 정도 갈등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여전히 두 세계에 살게 되었던 것이지요. 단지 그 사이에 좀 더 명확한 구분이 생긴 것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과학자의 옷을 입고 있을 땐 과학의 세계에서만 살고, 신앙인의 옷을 입고 있을 땐 신앙의 세계에서만 살기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저 자신과 합의를 본 것이었습니다. 


이런 두 세계에 속한 채로 저는 별 문제 없이 대학원까지 마치게 됩니다. 미국으로 건너가 박사후연구원 생활도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거기서 인생의 낮은 점을 맞이하게 되지요 (저의 첫 저서 ‘과학자의 신앙공부’에 비교적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그때였던 것 같습니다. 제가 가진 신앙을 돌아보게 되었고, 그것이 일이 잘 풀리고 여유 있고 평안할 때만, 그 시스템 안에서 순응적일 때만 유효한 신앙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위기와 고난과 역경이 찾아올 땐 아무런 힘이 없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제가 저의 부모님 세대에 속한 사람이라면 그조차도 별 문제 없이 넘어갔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성적인 부분에서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마냥 덮어놓고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저는 비로소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에게 어려움이 닥치니 그제야 갈급해진 것이었습니다. 제 신앙은 흔들리는 것 같았고 붕괴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습니다.


그 무렵 이런저런 신학 서적을 마구잡이로 읽게 됩니다. 제가 궁금했던 신학적인 질문들은 담임 목사님이나 부목사님들도 답을 해주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저를 교만한 사람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저는 신학적인 질문들과 성경의 모순된 이야기들을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나눌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물론 모든 교회가 그런 건 아니겠지요. 일반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가 목사님들의 신학 지식을 거치지 않고 직접 신학책을 읽으며 고민하기 시작한 이유입니다. 물론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읽었답니다. 


그런 여정 속에서 과신대라는 단체를 알게 되고 우종학 교수님의 책을 읽게 됩니다. 창조과학에 대해서도 재해석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가 편향된 생각으로 가득 찬 채로 조그만 우물 안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제가 알고 있던 기독교와 예수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 그리고 창조주의 의미, 과학과 신앙 사이의 갈등 등이 모든 기독교인이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이 아니라 다양한 해석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저에게는 하나뿐인 진리였던 것들이 그저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처음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저에게는 인식의 개혁이었습니다. 그러나 감정적으로는 정말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한편으론 계속 우기고 싶었거든요. 우물 안에 있을 때가 행복했다고, 계속 그 안에 머무르고 싶은 마음도 컸거든요. 심지어 제가 대학생, 대학원생 때 했던 것처럼 그냥 안 보고 안 들으며 두 세계를 살면 될 거라고 저를 합리화하기도 했었답니다. 그러나 그게 지속 가능하지 않더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제가 그렇게 저항하려는 그 마음이 바로 교만의 실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알고 보니 저처럼 고민하고 갈등하는 (과학과 신앙 사이의 갈등 뿐만이 아니라 신앙 전반에 관하여) 그리스도인이 많았습니다. 페이스북과 책으로 그들과 소통하고 공부하면서 하나씩 차근차근 질문에 답을 찾아나가게 됩니다. 비로소 저는 저를 벗어나 밖으로 나가 연대하면서 공부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이 가장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의 신념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말입니다. 그 신념은 정통 신앙 혹은 참된 믿음 등의 옷을 입고 있을뿐 안일한 자기 안의 요새일 뿐이었습니다. 그 신념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면 그동안 가져왔던 모든 게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에 과감히 버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듯 저는 마침내 그리스도인 과학자로서 자유하게 됩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배워온 신앙 속에 깃든, 정통 혹은 순수로 덧칠한 무지함을 버리고 자기 객관화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으로 노선을 바꿔 타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왜 그리 어렵던지요. 이런 면에서 저는 여전히 창조과학에 함몰되어 있는 '열정적인 순수함'을 가지고 전투적인 모습을 띠는 그리스도인들을 공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들에게 조용히 객관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으로 권면을 지속하고 있지만요. 


창조과학을 신봉하는 자들이나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이 계속해서 진화의 증거가 부족하다느니 불완전하다느니 하는 이유를 대면서 중립적인 과학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악마화 시킬뿐 아니라 프레임을 씌워 마치 과학이 무신론을 대변하는 것처럼 쉽게 만들어 버리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그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계속해서 증거들은 발굴되고 찾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증거들 앞에서도 끝내 자신들의 신념을 버리지 못할 가능성이 많다고 봅니다. 그들에게 부족한 건 지성/이성/과학적인 증거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의도적인 거절을 단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증거에 기반한 판단 혹은 결론이 아니라 판단 혹은 결론을 내려놓고 증거를 모으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이성에 호소하는 방법도 꼭 필요하나 감정적인 부분에서 상처나 약한 부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그랬듯이 말이지요. 그러나 그것만 내려놓고 잠시라도 과신대를 통해 기본적인 공부를 해보시길 강력하게 저는 권합니다. 감정적인 의도적 거절 때문에 많은 부분에서 불필요한 마찰을 만들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 걸어 잠그고 그 안에서 평화로다, 하지 마시고 문 밖을 나와서 당당하게 스스로를 드러내고 참 신앙이 무엇이지 증명해보시기 바랍니다. 자기 자신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말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자 생물학자입니다. 저는 진화는 지금도 관찰 가능한 자연 현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기원이나 인간의 기원은 진화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주진화나 화학진화 말고 생물진화는 DNA의 변이가 진화의 시작이고, 그 말은 생물진화는 무로부터가 아니라 기존 생물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즉, 창조/진화 프레임에서 가장 큰 이슈인 기원에 관련된 문제는 생물진화로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과학자가 하는 말입니다. 과학자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문제는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마치 진화로 모든 기원을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이들은 과학자가 아니라 과학만능주의자 혹은 진화주의자일 뿐입니다. 바로 이들이야말로 창조과학자, 근본주의자 할 것 없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의해야 할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과학자들이나 근본주의자들은 과학에 대한 오해를 겸손한 공부를 통해 풀고 불필요한 과학과의 전쟁을 끝내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적은 과학이 아닙니다. 과학을 만능으로 보는, 진화를 만능으로 보는 과학주의자, 진화주의자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앞으로는 대화 같은 대화가 이루어지려면 이 부분에서 서로 수긍하고 시작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런 면에서 제가 쓴 두 권의 신앙 서적 (과학자의 신앙공부, 생물학자의 신앙고백)을 꼭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과연 진화를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신앙을 공부하고 고백하는지 한 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생물학자 중에 그리스도인임을 당당하게 밝히고 진화를 사실로 받아들인다고 하는 사람은 아마 찾아보기 힘드실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제 책을 꼭 읽어보시고 이런 생각과 사상과 신앙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일 수 있는지 살펴봐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알고 보면 정말 우린 별 것 아닌 문제로 불필요한 싸움을 해왔는지도 모릅니다. 이론적이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논쟁을 잠시 뒤로하고 저와 같은 신앙을 가진 생물학자의 신앙공부와 신앙고백이 어떤지 꼭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책을 구입하지 못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분들은 저에게 메신저나 댓글로 연락을 주시면 제가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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