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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faith

부채감 그리고 버티는 힘

가난한선비/과학자 2024. 3. 7. 08:25

부채감 그리고 버티는 힘

내 삶을 지탱하는 하나의 힘은 부채감에서 비롯된다. 대학 시절에는 늘 다 읽지 못한 채 시험을 쳐야만 했던 교과서의 무지막지한 분량 때문에, 대학원 시절에는 읽어도 읽어도 읽을 게 더 많아지기만 하는 논문 때문에, 그리고 인생의 후반전에 들어선 이후에는 책장에서 점점 수가 늘어나며 늘 날 조용히 노려보고 있는, 읽지 않은 채 꽂혀 있는, 책 때문에 나는 매일 부채감을 느낀다. 나의 게으름을 탓 하기도 하지만 그런다고 긍정적으로 얻을 수 있는 거라곤 조금 부지런해지는 것밖에는 없으므로 언젠가부턴 게으름으로 인한 스스로의 비난에서 많이 자유로워졌다. 물론 그렇게 탓하는 것은 마지막 숨을 다할 때까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삶에서 건설적인 무엇인가를, 특히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해내지 못하는 것들을, 성실하게 지속하는 행위가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과업이라고 믿는 나를 지금까지 만들어온 동력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부채감으로 인한 문제는 간단하다. 그 부채감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런데 답은 간단하지 않다. 보통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부채감에 짓눌리는 것, 다른 하나는 그 부채감을 땔감으로 사용해 묵묵히 전진하는 것. 흔히 이런 인생의 중요한 문제를 대할 때마다 행복이라는 단어를 잣대로 들이대며 평가하려고 하는데, 제발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 두 부류에게 행복하냐고 물으면 저마다 다른 대답을 하게 될 것이지만, 아마도 둘 다 그리 행복하지는 않다고 고백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물론 부채감에 짓눌리는 게 행복한 사람은 없을 테지만, 부채감으로 동력을 얻어 앞으로 나아가는 건 충분히 행복하지 않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보통 이렇게 앞으로 나아가는 모든 순간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상태가 되지 못한다. 전진한다는 표현이 무사 같은 강한 인상을 풍겨서 그렇지 실제로는 간신히 버티는 거라고 말해야 더 솔직하고 정확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행복해 보이는 건, 혹은 행복했다고 평가를 내리는 건 언제나 차후의 일이다. 현재진행형인 사람은 잘 모르기 마련이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일상 중 예기치 못한 찰나에 미래에 느낄 그것을 미리 보고 알고 느끼며 현재를 감사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내가 가진 신앙으로 이런 순간들을 꽤 자주 맞이하는 편이다.

버티는 것. 나는 이 단순하고 때론 무식하게 보이는 힘를 사랑하게 되었다. 버티는 순간들이 인생의 후반전을 속속들이 채우고 있고, 그 순간들을 함께 하는 동지들과의 연대가 삶의 깊이와 풍성함을 더하게 하며, 그러는 와중에 점점 지경이 넓어지고 눈이 깊어져가는 나로 거듭나게 되기 때문이다. 혼자선 시도할 수도 가능할 수도 없는 일들이다.

버티는 힘. 이거 보통 힘이 아니다. 가만히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으며, 멈춘 것 같지만 방향을 잃지 않고 전진하는 힘이다. 불필요한 말과 생각과 무분별한 시대의 조류에 휩쓸리지 않고 겸손하고 진정성 있는 마음가짐으로 느리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다. 강한 자가 살아남을 수도 있으나 이 경우엔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버티는 자가 살아남는 자다.

버티는 자는 살아남은 자일 뿐 아니라 저항하는 자이고 분별하는 자이며 곧 지혜로운 자로 성장하고 성숙할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라고 나는 믿는다. 늘 성실히 지속하기 때문에 어쩌다가 맺은 열매의 성공 또는 실패 때문에 일희일비 하지 않게 된다. 버티는 자는 꼿꼿할 때 꼿꼿한 법이다. 그리고 종종 이 꼿꼿함은 초월을 이룬다.

부채감에 짓눌리거나 핑계로 만들어 자신의 어리석음을 설명하려거나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부채감을 동력으로 전환시켜 비록 현재 행복을 실시간으로 느끼진 못하더라도 버티는 힘으로 성실히 오늘 할 일을 오늘 해나가는 것.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때론 멍청해 보여도, 나는 이것이 나의 오늘 주어진 과업이자 평생에 걸친 과업이라 믿는다. 다들 주어진 자리에서 화이팅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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