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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공부
3월 7일 오전 10시 개포하늘꿈도서관에서 진행될 대중강연을 준비하면서 공부의 새로운 맛을 보고 있다. 생물학자로서 내가 했던 대부분의 공부는 전문용어 기반이었다. 대학원생 정도의 지식과 경험을 갖추지 않으면 옆에서 들어도 외계어로 들릴 법한 내용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런 공부는 어느 순간 나의 일상이 되었고 나는 그런 용어를 사용해서 발표하는 일에도 익숙해져 버렸던 것이다.
성인 40명 정원이 마감되었다는 사실을 지난주에 확인했다. 주말도 아닌 평일 오전 10시에 동네 도서관 강연에 참석할 성인이라면 대충 어떤 부류일지 짐작이 된다. 아마도 50-60대 여성분들이 절반 이상이지 않을까 싶다. 그들은 전문용어를 당연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들의 언어로 내가 쓴 책 내용을 풀어야 한다.
책을 쓸 때만 해도 ‘대중언어’의 무게를 이렇게 크게 느끼지 않았다. 아무래도 눈에 보이지 않는 독자들을 향해 쓰는 거라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강연이다. 같은 공간 안에서 같이 숨 쉬고 모두가 내 말에 귀 기울이고 나와 눈이 마주칠 성인 40명이 바로 내 눈앞에 앉아 계실 것이다. 게다가 나는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말을 해야 한다. 즉 보이지 않는 독자와 보이는 청중의 차이, 그리고 글과 말의 차이를 나는 이번에 뛰어넘어야 하는 것이다.
물처럼 자연스러웠던 단어 하나하나를 찾아보고, 논문에 나오는 그림이나 사진이 아닌 대중매체에 실린, 상대적으로 의미가 직관적으로 와닿는 자료를 찾는다. 공신력 있는 질병관리청이나 정부기관, 혹은 대학병원에서 게시한 글들을 살펴본다. 전문용어로 진행하는 세미나를 준비할 때완 사뭇 다른 기분이다. 얼떨떨한 느낌에 진도는 잘 나가지 않는데 시간은 잘도 간다. 파워포인트 몇 장 만드는데 몇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즐겁다. 좁은 우물 밖으로 나온 듯한 기분이랄까. 상아탑 바깥으로 탈출한 기분이랄까. 진도가 안 나가도, 시간만 흘러가도, 지금은 지금 이대로 놓아두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나는 지금 새로운 공부에 맛을 들여가고 있으므로.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강연 요청일지도 모른다. 내겐 여러모로 의미가 있을 것이기에 최선을 다해 준비할 생각이다.
또 한 가지 의외의 흥미로운 사실은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공부를 하다 보니 내용이 더 풍성해진다는 점이다. 깊이만 추구할 땐 좁고 편협하고 옹졸해진다는 느낌이 강했는데, 풍성함을 향하니 지경이 넓어지는 것 같다. 뾰족한 무엇인가를 계속 가는 행위가 아니라 무언가를 넉넉히 담을 수 있는 그릇을 준비하는 것 같다고나 할까. 아무튼 즐거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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