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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와 쓰기

가치

가난한선비/과학자 2025. 3. 22. 09:11

가치

천 페이지 안팎의 장편소설을 진득하게 읽어냈을 때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 쾌감은 중독성이 강해 반복을 유도한다. 물리적인 시간이 허락되지 않아 그 부름에 응하기 어려울 뿐 나는 항상, 특히 곤고한 날에, 그것에 대한 갈증을 느낀다. 벽돌 깨기는 독서의 맛을 가장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벽돌을 깨기 위해서는 수십 시간이 필요하다. 보통 한 시간에 50-100페이지 정도 읽어나간다고 가정할 때, 1,000페이지 분량의 벽돌이라면 집중해서 책을 읽는 시간만 따져도 적어도 10-20시간이 소요된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적어도'이다. 직장을 가진 사람이 일상에서 그 정도의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 같은 경우만 해도 평일엔 기껏해야 1-2시간 독서에 할애할 수 있다. 어떤 약속이 없는 주말엔 시간을 더 투자할 수 있지만, 하루 종일 책을 읽을 수는 없으므로 많아야 4-5시간 정도이다. 평일에 1시간, 주말에 4시간 정도를 잡으면, 약 2주 정도가 소요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일상에서 어떤 약속이 잡히기도 하고 일이 많아 책을 붙잡고 있을 시간이 나지 않기도 하기 때문에 보통은 한 달 정도 걸린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벽돌 깨기는 언제나 요원한 과업인 것이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도스토옙스키와 저녁식사를' 독서모임과 함께 읽어냈다. 다들 위에 적은 대로의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었던 것이다. 나는 동지애를 느꼈다. 비록 공간은 다르지만 한 달가량을 같은 책을 붙들고 사투했다는 사실은 같은 전투에 참여한 군인들이 느끼는 어떤 전우애에 비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함께라서 가능했다는 말도 덧붙인다. 혼자라면 포기할 기회를 수도 없이 맞이했을 테니까. 지속해서 끝까지 가기 위해 필요한 건 개인의 의지, 물리적인 시간, 그리고 동지들인 것이다.

오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벽돌을 깼을 때의 성취감은 단지 그것을 깼다는 데에서 오는 것만이 아니라, 그동안 다른 책들을 읽지 못했는데 이제야 읽을 수 있다는 해방감도 톡톡히 한몫을 담당한다는 생각. 실제로 거의 한 달간 아무 책도 손에 들지 못했다. 그저께 모임을 마치고 느꼈던 성취감 플러스 해방감은 아마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공감하기 힘들 것이라 생각한다. 아무튼 이제 다른 책을 읽을 수 있다. 책장에 꽂혀 대기하고 있는 많은 책들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어떤 큰 것을 해내기 위해 포기해야만 하는 많은 작은 것들. 이런 것들이 가치를 상승시킨다. 우리 삶의 많은 부분에서도 비슷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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