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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의 원형 혹은 쉬운 버전의 도스토옙스키
니콜라이 고골 저, '외투'를 읽고
고골이라는 작가도, '외투'라는 작품도 모두 도스토옙스키와 그와 관련된 여러 자료들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도스토옙스키가 말했다고 전해지는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라는 문장이 아니었다면, 러시아 문학 전공자도 아닌 내가 굳이 이 작품을 찾아 읽는 수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 인생에서 도스토옙스키라는 이름은 이젠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무게를 지니기에, 그가 지대한 영향을 받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작가의 작품을 못 본 체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 나는 고골이나 '외투'가 궁금했다기보다는 도스토옙스키의 눈에 비친 고골과 '외투'가 궁금해서 이 책을 펼쳤던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에게 너무 익숙해져 버린 탓인지 작품의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낯설다는 느낌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진부할 정도로 친숙함이 느껴졌고, 몇 단계 쉬운 버전의 도스토옙스키를 읽는 듯한 기분마저 느꼈다. 문제는 다 읽고 나서도 도스토옙스키가 왜 그리도 극찬을 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라는 문장을 명징하게 이해하고 동의하게 되길 내심 바랐는데 말이다. 물론 내가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배경을 잘 몰라 놓친 게 있을 수도 있겠지만, 러시아 문학에서 고골이 가지는 의미를 이 작품 하나만으로 느낄 만한 능력이 내겐 없었다. 여러 모로 아쉬운 작품이었다.
찾아보니 고골은 1809년생이고 도스토옙스키는 1821년생이니 나이도 띠동갑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하면 적어도 고골보다도 10년이나 이른 푸쉬킨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러면 도스토옙스키와는 22년 차이이므로 한 세대 차이라고 볼 수 있다), 띠동갑이면 선후배라고 해도 될 만큼 거의 같은 세대이다. 그렇다면 '지대한 영향'이란 고골이라는 작가의 존재가 아닌 그의 작품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텐데, 그의 대표작이라고 불리는 '외투'를 읽고도 도스토옙스키에 미치지 못하는 작품성을 발견한 나로서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 현상을 도스토옙스키의 천재성 혹은 탁월함으로 해석하는 게 맞겠다 싶다. 고골이 아닌 저 유명한 푸쉬킨보다도 나는 도스토옙스키에게 더 큰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전적으로 주관적인 평가이니 고골이나 푸쉬킨 팬들은 노여워하지 마시길.
'외투'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중년의 9등 문관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정서밖에 할 줄 모르는 오타쿠다. 극빈층에 속한 그의 외투는 이미 낡을 대로 낡아 더 이상 수선할 수조차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동안 수차례 수선을 해줬던 페트로비치에게 찾아가지만 그도 이번엔 단호하게 새 외투를 사라고 할 뿐이었다.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한 우리의 주인공은 이런저런 방법으로 돈을 모아 페트로비치로부터 새 외투를 맞춘다. 늘 루저처럼 다니던 아카키가 새 외투를 입고 출근하자 직장에선 놀라움의 대상이 되었는데, 마침 명명일을 맞이한 직장 상사의 초대에 응하게 되어 저녁 식사에 참여한다. 그에겐 첫나들이, 첫 사교 활동이었던 것 같다. 그곳에서 평소라면 잠잘 시간도 훌쩍 넘기게 된 그는 도저히 지루함을 참지 못한 채 다시 외투를 입고 먼저 자리를 뜨는데, 돌아오는 길에 그만 강도를 만나 외투를 빼앗긴다. 아카키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세상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에 흠뻑 취해있다가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진 것처럼 봉변을 당했기 때문이다. 외투를 찾기 위해 경찰서장을 찾아 가지만 원하는 해결을 보지 못한 그는 그다음으로 '중요한 인사'를 찾아가는데, 거기에서 그만 모욕적인 대우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분통이 터진 나머지 아카키는 병이 드는데, 어이없게도 며칠 만에 죽고 만다.
여기에서 작품이 끝날 법도 한데, 고골은 이 장면 이후 유령을 등장시킨다. 가난한 사람들과 그들을 함부로 대하는 고위 관료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현실 고발성 작품에서 다분히 낭만성을 띤 환상소설로 넘어가는 것이다.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의 유령은, 독자들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 행인들의 외투를 훔치게 되는데, 결국 그를 죽음으로 가게 만든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인사'가 걸려들고 그의 외투를 빼앗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설마 했는데, 그 '중요한 인사'는 유령을 만나 외투를 빼앗긴 이후 부하 직원들에게 질책을 하더라도 자초지종을 다 듣고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개과천선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럴 수가! 게다가 어찌 된 일인지,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일이 있고 난 후부터 유령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고골은 이 장면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쓴다. "장군의 외투가 그 유령에게 꼭 맞는 게 틀림없었다." 아아, 이럴 수가! 이 클래식한 상상력이라니~!
이제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저 문장을 다음과 같이 재해석하고 싶다. '고골의 외투에서 나온 도스토옙스키'를 '고골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지만 그를 가뿐히 뛰어넘은 도스토옙스키'라고 말이다. 도스토옙스키를 읽기 전에 이 작품을 읽었다면 순서가 아주 이상적이었을 것 같다. 이 책엔 '외투' 말고도 다른 단편들도 함께 실려 있다. '코', '광인일기', 그리고 '감찰관'이다. '외투'를 먼저 읽고 읽으려는 게 초기 계획이었는데, 아무래도 수정해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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