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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onologue

카레

가난한선비/과학자 2026. 1. 18. 12:44

 

카레

맛있는 카레를 만들기 위한 가장 쉬운 필살기는 퓨어 올리브유를 적당히 두른 팬에 미리 채 썬 수북한 양파를 중불에서 오랫동안 타지 않고 예쁘게 갈색이 나올 때까지 (aka 카라멜라이징) 볶는 것이다. 이 과정이 필살기인 이유는 그냥 양파를 대충 볶아서 카레를 만들 때완 달리 양파 특유의 깊은 단맛이 우러나와 카레를 한 입만 먹어도 고급진 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과정에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적어도 30분 정도 공을 들여서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 저어주며 볶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만든 카레를 한 번 맛을 보면 이 과정을 결코 생략할 수 없다.  

다 볶은 양파는 푹 숨이 죽어 있을 것이고, 그걸 잠시 옆에 빼놓은 후 찬물에 핏물을 뺀 소고기를 살짝 볶는다. 볶은 소고기 역시 옆에 잠시 빼 두고 이제는 미리 썰어둔 감자와 당근을 살짝 볶는다. 모든 감자와 당근이 기름칠되고 데워졌다고 판단이 되면 아까 빼두었던 소고기와 양파를 넣고 함께 버무린다. 고형 카레를 풀어둔 물을 넣고 중불에서 끓을 때까지 중간중간 바닥에 눌어붙지 않도록 저어주면서 기다린다. 끓기 시작하면 약불에 놓고 십여 분 더 저어주면서 기다린다. 그리고 불을 끄고 식힌다. 보통 저녁에 이 과정을 실행하기 때문에 뚜껑을 덮은 채로 다음날 아침까지 그대로 둔다. 아침이 되면 기분 좋은 마음으로 다시 중불로 저어주면서 카레를 끓인다. 기름기가 둥둥 떠 있을 경우 숟가락으로 제거해 준다. 따뜻한 밥을 데운 후 그 위에 카레를 듬뿍 올린 뒤 호호 불면서 맛있게 먹는다.  

아들이 미국으로 간 지 반년 정도 지났다. 그 후 오늘 처음으로 쿠쿠 압력밥솥에서 밥을 했다. 그리고 카레도 만들었다. 혼자 살게 될 때 먹는 것들 중엔 의외로 아들과 함께 있을 때 요리하던 것들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생각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아빠였구나, 아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었었구나…  

나는 과연 좋은 아빠였을까, 그러려고 애는 썼지만 언제나 돌아보면 후회되는 것들이 수북하고 다시 돌이키고 싶은 것들 역시 쌓여있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늘 뒤돌아볼 때 그 사건과 상황의 의미를 비로소 재해석하고 소중함을 깨닫는 한계를 가진다는 걸 모르지 않고, 나는 늘 양파를 중불에서 카라멜라이징 시키며 볶는 마음으로 아들을 대했지만, 그래도 나는 늘 아쉽다. 성장이라는 이름 하에 놓쳐버리고 마는 소중한 것들이 그렇게 흘러가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마음이 살짝 무너진다. 아빠로서의 내 모습은 과연 아들에겐 어떤 색으로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까. 과연 내 진심이 어느 정도로 전달이 되었을까. 며칠 뒤면 만 17세가 되는 아들에게, 미국에서 다시 적응하느라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아들에게 구정 연휴 때 보면 멋진 선물을 해야겠다.  

불확실하지만 불안하지 않다는 문장이 자꾸만 생각이 난다. 내가 내뱉은 말을 내가 곱씹으면서 생각에 잠기는 게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나의 현재와 미래를 담지하고 있는 것 같은 강한 느낌이 들어 그런가 보다 싶다. 나이 들며 느는 건 합리적이지 않은 조용한 자신감일까. 흠…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다. 아니, 썩 만족스럽다는 생각이다. 인생의 후반전이 바야흐로 본론으로 접어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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