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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
큐티의 부흥 시기를 직접 경험했고 그것의 문제점들을 또 직접 경험했으며 지금은 더 이상 일반적으로 알려진 방식으로 큐티를 하지 않는 나는 큐티 문화가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증진시키는 효과보다는 정체시키는 효과가 크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이 점에 대한 나의 사견일 뿐이라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큐티의 유익은 시간과 장소를 구별하여 매일 하나님 말씀을 들여다보고 묵상하며 자칫하다간 휩쓸리기 쉬운 시대의 조류 한가운데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사명을 점검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일반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그리스도인들은 세 가지 장소에서 그에 따른 정체성을 입는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직장(혹은 학교), 그다음으로 시간을 많이 보내는 가정, 그리고 상대적으로 가장 시간을 적게 보내는 교회에서 각각 직장인, 부모나 자식, 그리고 교인으로 말이다.
(물론 교회가 직장인 사람도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제외하기로 한다. 즉 이 글에서는 목회자는 제외한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정체성 간의 괴리 역시 매우 중요한 문제이지만 여기에서는 다루지 않기로 한다.)
세 가지 역할을 모두 다 잘 감당하기 위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부단히 노력한다.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 가지 역할을 감당하기에도 벅차 신앙인으로서는 뭔가 빠진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된다는 점이다. 이런 순간들을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삶의 의미가 없다고들 말하고, 신앙인들은 영적으로 침체되었다고 표현한다.
인간이란 존재자 자체가 저 너머를 궁금해하고 의미 중독자라는 본질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는지라 이런 순간들을 맞이하게 되면 인간은 공허함, 허무함, 허탈함 등의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이런 순간들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도둑처럼 불쑥 찾아오기 때문에 한 번만 경험해도 타격감이 크다. 그러나 이런 순간들 때문에 적어도 살아가면서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들이랄까 내면의 숙고랄까 하는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많은 경우 내면의 성장과 성숙이 일어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물론 더 비뚤어지는 경우도 왕왕 생기지만).
여러 가지 취미생활을 가져보는 것이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탈출구로 작용한다. 무언가에 빠져보는 것이 공허한 기분을 느끼는 불안함과 불쾌감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 문제는 운동이나 독서와 같은 건전한 취미생활이 아니라 도박이나 마약과 같은 것에 빠지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는 것인데, 이 문제는 이 글에서 다루지 않기로 한다.
반면 신앙인들에게 탈출구가 되어주는 것 중 대표적인 게 바로 큐티다. 큐티 문화가 부흥하기 전에는 앞에서 말한 세 가지 정체성 중 교회에서의 정체성을 나머지 두 정체성보다 앞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다시 말해 교회에 가서 시간을 어떻게든 많이 보내는 것이 마치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적도 있었다. 아마도 20세기말까지만 해도 이런 생각들이 편만했던 걸로 기억한다. 나도 이런 문화에 잠시 휩쓸려 학교 마치고 교회에 들리는 게 일상이었던 적도 있었다. 물론 금세 사그라들고 말았지만 말이다.
큐티는 굳이 교회로 갈 필요가 없게 만들어주었다.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또는 교회에서도, 시간과 장소를 구별하기만 하면 언제 어디서나 마치 교회당에 가서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하는 효과를 낼 수 있게 되었다. 큐티 교재도 봇물처럼 쏟아졌다. 대형교회 같은 경우는 교회 자체에서 소책자를 제작하기도 했고 기독교 출판사들은 국내 유명한 목사들을 섭외하여 책을 제작하거나 국외(특히 미국)에서 이미 출간된 교재들을 번역하여 마구 찍어냈다. 나 역시 큐티를 하지 않으면 뭔가 신앙생활이 삐걱거린다고 믿었을 정도로 빠져 있을 땐 큐티 교재가 세 권인 적도 있었다. 하나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디보우셔널 북(Devotional book, 제목이 기억 안 난다), 다른 하나는 오스왈드 챔버스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 (이건 한국 번역본과 영어 원문 둘 다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그 당시 다니던 교회에서 제작한 소책자였다.
이런 책들로 인해 어느 정도는 마음에 평안을 느꼈다. 큐티를 하지 않은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의 나에게 유일하게 남아 있는 기억은 하나로 압축할 수 있는 것 같다. 나는 적어도 신앙인으로서 뭔가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좋았다는 것. 직장 일이나 가정 일에 치이지 않고 시간을 내어 큐티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내 모습이 좋았다. 마치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게 설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고 할까 (물론 그럴 수는 없겠지만)? 아무튼 나는 그때 읽었던 하나님 말씀은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고, 성경이라는 책 자체에 대해서도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그날 주어진 단편적인 성경구절을 읽고 내 삶에 적용하여 반성 같지도 않은 반성을 한답시고 내 안에 언제나 존재하는 이기성과 욕망 같은 것들을 책망하고 죄책감을 느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 마치 뭔가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뒤처지지 않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은 기분 좋은 착각 속에 빠질 수 있었다.
어쩌다가 그날 주어진 성경구절이 신기하게도 그날 내가 겪었던 일의 재해석과 딱 맞아떨어질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큐티의 힘이라거나 말씀의 권능이라거나 하는 표현을 쓰며 나는 내가 참 그리스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취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이런 사건들은 큐티의 장점을 서로 얘기할 때마다 꺼내 쓰곤 하는 단골소재가 되었다. 아마 누군가는 이런 사건들이 큐티를 하면 자주 발생하는 건가 싶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거의 벌어지지 않는다. 대부분은 내 일상과 무관한 것 같은 성경구절과 해석이 짧게 적힌 그날의 큐티를 보며 마치 은혜받은 것처럼 흉내 내는 모드로 있는 시간들로 이루어졌다.
어느 날 큐티라는 걸 하게 되었고, 어느 날 다시 큐티를 하지 않게 되었다. 특정한 계기가 있었던 것 같진 않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한 가지 이유를 꼽자면, 나 자신으로부터 가식과 위선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솔직해야 하는데, 어느 날 돌아보니 신앙 좋은 척, 믿음 좋은 척, 아무 문제가 없는 척하는 내 모습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서 있지 않고 매일 큐티를 하는 내 모습을 보는 내가 좋았고 또 그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좋게 봐주는 게 좋았던, 그러니까 큐티의 매너리즘에 빠진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 좋았던 게 아니라 큐티하는 내 모습이 좋았던 것이고, 하나님 말씀을 사모했던 게 아니라 그날의 성경구절을 어떻게 기가 막히게 적용하는지 그 스릴을 만끽하는 것이 좋았던 것이며, 성경이 궁금해지고 읽고 싶어지는 게 아니라 그날의 성경구절만 읽으면 할 일을 다 한 것 같은 만족감이 좋았던 것이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큐티 교재를 보며 성찰하고 반성하는 내 모습을 몰래카메라로 찍었다면 정말 우스운 꼴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몰래 큐티를 할 때면 죄인 모드가 되어버리는 내 모습이 지금 생각해도 웃긴다. 아,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는 것 자체가 우습다는 게 아니다. 오해하지 마시라. 문제는 그렇게 죄인 모드가 되었다가도 큐티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원래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큐티의 효과가 삶 속으로 녹아들어 삶을 변화시키는 용도로 사용되어야 할 텐데 나는 큐티하는 시간을 가졌다는 것 자체에 기쁨을 느꼈고 그것을 매일 해내는 나 자신이 자랑스럽고 좋았다. 내 삶에 변화는 일어나지도 않았다.
큐티의 가장 문제점은 자의적인 해석에 있을 것이다. 이를 좀 더 풀어보면 정말 많은 말을 할 수 있을 텐데, 딱 두 가지만 얘기해 보겠다.
첫째, 성경 말씀을 단편적으로만 읽기 때문에 지엽적인 해석에 머물 수밖에 없고 전체 맥락 혹은 전체 이야기를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내 상황에 적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읽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해석하게 된다.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성경 말씀이 나의 위로를 위한 도구로 전락해 버린다는 것이다. 어느새 큐티의 목적은 하나님 말씀을 읽고 하나님을 더 알고 하나님의 선교와 하나님 나라에 내 인생이 동참하게 되는 게 아니라 나의 사적인 위로와 만족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둘째, 공부하지 않게 된다. 큐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어느새 상식이 되어버리게 되면 더 이상 신앙의 성장이나 성숙을 위한 공부 혹은 연구를 하지 않게 된다. 신학자나 목회자가 아닌데 무슨 공부와 연구냐 싶겠지만, 천만의 말씀.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자 공부와 연구를 병행해야 한다. 공부와 연구는 신학자와 목회자의 특권 내지는 소유물이 아니다. 성경 전체를 읽고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야 하고 그걸 실천하는 삶이 보여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다 보면 알게 된다. 성경만 읽어서는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은 이상하게 읽으면 읽을수록 불편하고 모순되고 이해 안 되는 부분들이 많다는 것을. 그래서 공부와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성경 읽기가 언제나 편안하고 은혜가 된다고 하는 사람들을 나는 의심할 수밖에 없다.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이미 모든 의심의 어두운 숲을 지난 사람이거나, 성경을 한 번도 제대로 읽은 적 없이 주문 외우듯 대한 사람이거나. 아마 후자일 경우가 훨씬 많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공부와 연구가 필수다. 신학책을 기웃거리게 되고 성경 주석서를 기웃거리게 된다. 이건 영적 교만이 아니라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신앙인의 모습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아는 큐티 마니아들 대부분은 책을 읽지 않는다. 성경만 읽는다고 한다. 한 술 더 떠서 이들은 많은 경우는 성속을 이분법으로 구분한다. 성경이 아닌 책은 모두 세상 책일 뿐이고 찬송이 아닌 음악은 모두 세상 음악일 뿐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하면 안 된다고 믿는다. 놀랍게도 이들 중엔 태극기부대도 있고 이명박근혜윤석열을 옹호하는 사람도 있고 전광훈빠도 있다는 것이다. 큐티를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니다. 그러나 큐티만 하거나 성경만 읽으며 나머지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한 뒤 속되다고 판단하게 되면 사람 자체가 잘못된 수 있다. 반지성인의 우두머리가 되기 십상이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일반적인 큐티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루 중 한 시간 정도는 큐티, 그러니까 Quiet Time을 가진다. 이건 누가 뭐라고 해도 진짜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내 일상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에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닐 정도가 되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대신 나는 큐티 교재를 보지 않는다. 주로 책을 읽거나 묵상을 하거나 글을 쓴다. 나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내 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래서 소설을 읽거나 과학책을 읽거나 인문서적을 읽거나 신학책을 읽거나 철학책을 읽을 때에도 그 책에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신앙적인 입장으로 재해석하지 않을 수 없다. 매일의 일상에 적용하려고 아등바등하지도 않는다. 가끔 그게 맞아떨어질 때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런 것으로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하나님 말씀은 오늘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나는 하나님을 매일 더욱 알고자 할 뿐이다. 글을 쓸 때에도 마찬가지다. 글이란 건 신기하다. 내가 담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신앙인들의 은어들만 나열하는 글은 몇 번 쓰면 도돌이표가 되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다. 나만의 언어로 솔직하고 담백하게 하나님 앞에서 글을 쓰게 되면 그것이 묵상의 열매이고 큐티다.
신학공부하는 시간도 나에겐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과정이다. 큐티가 잘못된 문화는 아니지만, 큐티만으로 만족하거나 거기에 머무른다면 나는 그 사람의 신앙에 문제가 없는지 묻고 싶다. 이유식만 먹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신학책을 읽고 신학자의 강의도 들으며 성경을 더욱더 깊고 풍성하게 이해하고 싶지 않은가. 왜 이런 단계로 나아가지 않는가. 나는 이것이야말로 영적인 게으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놓고 큐티하는 삶이 마치 가장 신앙 좋은 사람의 일상인 것처럼 믿는 사람들을 보면 기가 막힐 노릇이다.
큐티는 좋은 문화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에 머물면 안 된다. 하나님은 큐티보다 더 크신 분이며 큐티로 가 닿을 수 없는 분이라고 믿는다. 물론 신학공부로도 가 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분량대로 신앙의 성장만큼 조금씩 깊고 조금씩 더 풍성하게 하나님을 알아가는 방식을 동원하지 않는다면 그건 정체라고 해야지 신앙생활을 잘 유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다.
놀라운 점 한 가지는 이런 나를 보고 큐티하지 않는다고, 마치 내가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고 영적 질서가 잡히지 않은 사람으로 대하면서 불쌍히 여기시고 기도해 주신다고 하는 분들이 계신다는 사실이다. 이분들에게는 큐티가 갑이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큐티는 이유식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이유식을 먹고 있으면서 그것이 가장 좋은 음식이라고 말한다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이제 단단한 음식도 씹고 깨물고 소화시킬 줄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기도는 됐다. 하지 마시라. 대신 스스로를 위해 기도하시길 바란다.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시고 보다 성숙한 신앙인으로 거듭나시길 바란다. 나도 당신을 함부로 뭐라 하지 않을 테니 당신도 나에게 함부로 불쌍히 여기거나 영적으로 침체되었다고 판단하지 마시라. 내가 교회에 다니기 싫은 가장 큰 이유도 바로 당신들 같은 부류 때문이다. 당신 같은 부류 때문에 큐티라는 좋은 문화가 욕을 먹게 되는 것이다. 큐티는 갑이 아니다. 그것으로 매일 하나님 말씀과 가까워지고 시간과 장소를 구별하는 습관을 들이는 건 아주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머물면 안 된다. 더 나아가라. 더 깊은 곳으로, 더 넓은 곳으로 말이다. 성경 전체를 숲으로 드라마로 읽을 줄 알고, 그 숲에 들어가 궁금한 나무들을 하나씩 조곤조곤 관찰할 줄도 알며, 한글 번역본이 품고 있는 한계들을 극복하고자 원어(헬라어, 히브리어)를 풀어주는 신학자들의 강의도 들어보라. 이런 것을 하게 되면 큐티를 하지 않는다고 함부로 판단했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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