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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영성 없는 사회적 영성이 불가능하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개인 영성만 집중하고 또 집중하다 보면, 언젠가는 (?) 때가 무르익었을 때 (?) 자연스럽게 (?) 사회적 영성이 표출된다는 식의 주장에는 난 동의하기 어렵다. 개인 영성 레벨에서 마치 득도라도 하여 해탈한 사람들만이 사회적 영성의 소유자가 된다는 식의 논리를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자랐던 한국 기독교 문화에서 (난 예장 합동측 교단, 성결교단, 감리교단에서 주로 중고대청 시절을 보냈다), 난 사회적 영성이라는 말조차 들어보지 못했던 것 같다. 기껏해야 교회당 안과 밖이 연결되는 시기는 연말에 불우이웃 돕기나 수해민 돕기 등과 같은, 비기독교인들도 누구나 동참하는 구제 활동에 국한되어 있었던 기억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대신 교회당 안에서 가끔씩, 그러나 끊임없이 강조되었던 건, 전 교인이 교회 건축에 동참해야만 하는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한 설교 (우린 여기서 약간의 죄책감과 약간의 협박을 느낄 수 있다)와 십일조를 게을리 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저주 아닌 저주가 녹아있는 설교 등이었다.
일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교회당 확장의 일환으로 교육관, 어린이집, 문화센터, 복지센터 건립 등의 계획에는 지역사회에 이바지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십일조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돈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에도, 십분의 구가 아닌 십분의 일만 내라고 하는 걸 감사하라는 말과 함께 (슬프게도 난 여기서 위로를 받았어야만 했다!), 난 모든 십일조가 결국 교회 확장으로 연결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지역 사회에 이바지하겠다는 명목 하에 실제로는 교회 확장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결론 지으면 삐딱하고 불건전한 빨갱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도 하며, '뭐, 내가 내는 십일조를 포함한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 건물이나 사람에게 주는 게 아니니까...' 하는 생각으로 나를 합리화하며 내 머리 속의 생각을 억눌러 왔었다.
논리는 비슷했다. 먼저 교회 확장에 올인을 하게 되면, 개인의 경제적 축복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사회적으로도 기여할 수 있게 된다는 식의, 마치 개인 영성과 사회적 영성 사이를 설명하는 듯한 인과관계 말이다.
이런 식의 논리에는 늘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 지역 사회에 이바지하는 교회로 성장하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교회 확장이 제대로 되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교인이 한 마음으로 교회 확장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가지고 있는 돈을 헌금하는 대신 개인의 유익을 위해 더 많이 사용했었기 때문인 것이다. 적극적으로 참여했었던 교인들은 기껏해야 '그래도 나는 아무개 집사보다는 더 냈으니까...' 하는 자위를 할 수 있을 뿐이고, 대부분의 교인들은 그저 더 큰 죄책감만 느끼게 된다. 그리고 더욱 더 사회적 문제에 둔감해 져야만 하고, 더욱 더 24시간 골방에서 주문 외우듯 방언을 하며 기도해야만 한다. 나오지 않았던 새벽기도도 시작해야 한다. 사회적 관계 형성에 중요한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는다. 점점 더 고립되어져 간다. 그래야 교회 확장을, 아니 그래야 사회적 영성에 이바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사회적 영성이라는 것이 이렇게 가지기 어려운 것일까. 도대체 개인 영성의 끝은 어디란 말인가. 도대체 얼마나 더 해야 그 자연스럽다고 (?) 배운 사회적 영성이 내 안에서 밖으로 표출되는 것일까.
사회적 영성이 개인 영성의 결과라도 되는 것 같은 이러한 논리는, 사회적 영성의 부재시 늘 개인 영성의 모자람으로 이유를 대면 그만이다. 더 열심히 더 경건하게 개인 영성을 쌓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각 개인에게 한 두마디 적절한 죄책감만 던져 주면 된다. 사회적 영성의 부재를 개인적인 죄책감으로 둔갑시키는 비결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김기춘도 아니고.ㅎ).
개인 영성과 사회적 영성은 인과 관계가 아니다. 사회적 영성을 개인 영성의 열매로만 설명할 순 없다. 이 둘은 마차의 두 바퀴와도 같다. 두 바퀴가 균형을 이루며 굴러가야 마차가 제대로 움직일 수 있다. 이는, 하나님나라의 실재가 예수를 섬기는 것에만 (하나님 사랑)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과 교제하며 섬기는 것에만 (이웃 사랑) 있는 것도 아닌 것과 같다. 하나님나라가 완전해지는 것은 이 두 가지가 함께 반응할 때다.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중심에는 좌나 우나 모두 원하는 하나님나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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