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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오다
작년 말에 ‘원미닛고 제6회 공모전 추천작’에 선정되어 숏폼이 제작되었다는 이메일을 보름이 지나서야 확인습니다. 그럴 듯하게 제작된 것 같지만, 저자로서 저는 탐탁치 않네요. 글을 절반 채 담아내지 못한 것 같아서요. 저와 같은 생각을 하신다면, 링크를 클릭해서 영상을 보신 후 아래에 있는 원문을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이왕이면 숏폼에 좋아요도 눌러주세요~
1화
https://youtube.com/shorts/eB1m0rNcwgA?si=T-L8OqjDHrqZrGHi
2화
https://youtube.com/shorts/RCZ_5G70xH4?si=b5BKhZiVxxSUBt3m
3화
https://youtube.com/shorts/jKf3uF4aRHE?si=wqGZqfGU-bZA0E8q
사랑이 오다
1.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내렸다. 잔잔했던 빗줄기 사이로 간간히 햇살이 비치는 아름다운 날이었다. 비 오는 날 내려다보는 인파는 형형색색의 모자이크와 같다. 사람은 색깔과 크기만 다를 뿐 모두 똑같은 우산이 된다.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큰 사람도, 작은 사람도 모두 비에 젖지 않으려 우산 밑에 웅크린다. 나는 평소처럼 차갑고 커다란 창에 바짝 기대어 한참 동안 넋 놓고 밖을 바라보다가, 식은 커피잔을 놓아둔 채 집을 나섰다. 감상에 더 젖어 들기 전 비를 맞는 쾌감을 직접 느껴야 했기 때문이다. 왠지 무지개를 볼 수 있을 것만 같아 불안했던 그날. 난 검은 우산을 들고 길을 나섰다. 요동치는 심장과 불안함을 덮기 위해 가슴에 두꺼운 책을 꼭 안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인파에 합류했다.
2.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난 비 오는 날을 좋아했다. 이층 창가에 앉아 길거리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나도 하나의 모자이크가 되어 세상의 일부가 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날이기 때문이다. 본능이었을까, 절박함이었을까. 세상으로부터 늘 멀리 떨어져 방관하는 삶을 즐기던 나도 비가 오는 날이면 용기를 내어 세상 속으로 나가곤 했다. 햇살 좋은 날 길거리 사람들의 시선은 반대편 사람들의 얼굴이나 옷차림을 향한다. 하지만 비 오는 날은 다르다. 그들의 시선은 주로 땅을 향한다. 넘어질까, 오물이 묻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비 오는 날은 나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더 잘 느낄 수 있었다. 휙 지나쳐 버리는 차로 인해 튕기는 오물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공평하게 흩어졌다. 나는 그게 좋았다. 비가 해낼 수 있는 이 역설적인 일. 비가 더 자주 내리면 좋겠다.
3.
난 하나의 눈으로 별 지장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세상에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그와 동시에 나는 흉측하게 일그러진 반쪽 얼굴로 세상의 어두운 반쪽에 숨어 세상을 엿보는 몇 안 되는 사람, 아니 유일한 사람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였을까.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비 오는 날을 좋아했던 어두운 나. 비겁하게 숨어서 세상을 관찰하던 나. 어떤 때는 어쩌면 그 모습도 내가 그렇게나 비판했던 세상 사람들의 비린내 나는 모습과 하등 다를 것 없다는 생각에 이른다. 그럴 때면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들고 있던 커피잔을 놓칠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세상을 조롱하고 경멸하면서도 동시에 몰래 세상의 한 부분이 되는 것에 쾌감을 느꼈던 나. 그렇다. 난 그렇게 모순을 숙명처럼 지닌 채 늘 이중적인 삶을 살아왔다.
4.
내게 남아 있는 유일한 어릴 적 기억은 저 멀리 사라져 가는 어머니의 나지막한 숨소리, 그리고 그것을 안타까워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날카롭게 내 오른쪽 눈을 파고든 어떤 파편이었다. 잠에서 깨어나니 병원이었다. 온 세상이 왼쪽만 보였다. 오른쪽을 볼 수 없게 된 비극의 정점은 왼쪽 눈 하나로 거울을 보았을 때 비친 나의 오른쪽 얼굴과 목을 본 순간이었다. 차라리 왼쪽 눈도 잃어버렸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그날의 사고는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말문이 막힌 나는 고개를 돌려 우두커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턱까지 차오른 분노는 빗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눈을 감자 남은 한쪽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남은 한쪽 얼굴을 조용히 적셨다. 그날 이후 비는 내게 있어 은인 같은 존재가 되었다. 내리는 비처럼 흐르는 눈물은 한동안 마를 새가 없었다. 나를 위해 울어주는 하늘이 고마웠다. 나는 비 뒤에 숨어 비 안에서 모든 것들을 보았다. 굴절된 세상은 내게 있어 정상적인 세상이었다. 한쪽 눈으로 세상을 본다고 해서 세상이 반쪽 난 것도 아닌데, 내게 보이는 세상은 오로지 굴절된 반쪽일 뿐이었다. 저주를 받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자주 했다. 나는 자꾸만 작아져 갔다.
5.
한 손으로는 책을 가슴팍에 안고, 남은 한 손으로는 검은 우산을 들고 밖으로 뛰쳐나갔던 그날, 왠지 무지개를 마주할 것만 같던 불안했던 그날, 나는 그녀를 만났다. 순식간에 그친 비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에서 점점 비린내가 나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나는 어쩔 줄 몰라 입고 있던 후드 티셔츠에 달린 모자를 허겁지겁 뒤집어썼고, 들고 있던 책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축축한 바닥에 떨어진 채 햇살을 받아 반짝이던 그 책을 나는 선명하게 기억한다. 나는 마치 미처 자리를 피하지 못해 강렬한 태양을 마주해야만 하는 운명에 처한 뱀파이어가 된 것처럼 얼어붙어버렸다. 그때 그녀가 왔다. 그녀는 책을 덥석 주워 내게 건넸다. 사람들이 우산을 접자 세상에선 모자이크가 하나둘 사라져 갔고, 하늘엔 무지개가 피고 있었다. 말끝을 흐리면서 서둘러서 고맙다고 말하며, 책을 받아 쥐고 허겁지겁 돌아서려는 순간, 스쳐 지나가며 그녀를 잠시 힐끗 보았다. 그녀는 가만히 웃으면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놀라울 정도의 여유가 느껴졌다. 무엇보다 너무 그녀는 편해 보였다. 얼굴에는 내 것보다 더 커다란 화상 자국을 지닌 채로. 그녀는 아무것도 가리지 않고 당당하고 편안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 뒤로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화창하게 갠 하늘이 그렇게 아름다운 줄은 몰랐다. 눈에서 무언가 비늘 같은 것이 빠져나가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온전한 모습의 세상이란 바로 이런 건가 싶었다.
급기야 나는 받은 책을 다시 떨어뜨렸고, 그녀는 다시 그 책을 주워 웃으면서 얌전히 나에게 다시 건넸다. 아, 몇 초간 얼어버렸던 그 순간을 난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내게 사랑이 처음 온 순간이었다.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그녀는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시선에서는 비린내가 전혀 나지 않았다. 내 얼굴에서 심한 화상의 흔적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녀는 더욱 따스한 웃음을 지으며, 마치 오랜 동료를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내게 말을 건넸다. "책을 두 번이나 주워 줬으면 커피 한 잔 정도는 얻어먹을 자격이 있지 않을까요? 마침 바로 옆에 커피숍이 있네요. 호호호." 어떨 결에 난 커피숍에 난생처음으로 들어가 보게 되었다.
사람이 많고 언제나 따뜻한 느낌이 나는 커피숍은 내겐 금기와도 같았다. 그런 것들은 내겐 세상의 오른쪽에 있었던 것이다. 내가 잃어버린 오른쪽. 그러나 그녀 덕분에 다시 찾게 된 오른쪽의 세상. 얼마나 굳어 있었으면 난 그날 어떻게 커피숍에 들어갔는지, 어떻게 자리에 앉게 되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마치 알을 깨고 세상에 처음 발을 디딘 새와 같았다. 그리고 내 손엔 따스한 커피 한 잔이 들려 있었다. 그녀가 커피까지 산 것이었다. "매너남과는 거리가 멀군요. 호호. 신세 진 사람에게 커피까지 사게 하다니 말이에요.“
6.
그 이후로 우린 깊은 사이가 되었다. 그녀는 결코 나의 정체를 숨겨주었던 후드 티셔츠의 모자를 벗기지 않았고, 벗으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었고, 내가 아파하는 부분을 말없이 공감해 주었으며, 함부로 자신의 과거를 무기 삼아 나를 판단하지 않았다. 경솔하게 내 외모가 멋지다느니, 자신처럼 그냥 당당하게 모자를 쓰지 말고 다니라는 충고도 일절 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한때는 얼굴을 숨기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었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이 많이 힘든 건 사실이라고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 매일 아침 용기를 내야 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녀는 외모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틀에 박힌 교과서를 읊어대지도 않았다. 외모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지만, 그것보다는 사람의 성품이 더 중요한 가치라고 말해 주었다. 너무나도 당연해서 식상해진 그 말이 갑자기 살아나 내 온몸을 관통했다. 자신의 외모를 보고 난 직후 마치 괴물이라도 본 것처럼,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즉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는 사람들을 향해 화를 내거나 애써 설득하려 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반드시 자신의 내면을 이해하고 받아주는 사람이 존재할 거라 믿는다고 덧붙였다. 그중 하나가 바로 나라고 얘기해 주었다. 나는 사랑을 느꼈다. 그제야 한쪽 눈으로도 세상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7.
오늘도 비가 내린다. 여전히 나는 이층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형형색색으로 움직이는 모자이크를 바라본다. 그러나 달라진 게 하나 있다. 목적이 생긴 것이다. 나는 저만치 멀리서부터 투명한 우산 하나를 찾는다. 그녀의 우산이다. 그리고 나는 커피를 하나 더 내리고 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린다. 한 손에는 커피를, 한 손에는 검은 우산이 아닌 투명한 우산을 들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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