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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faith

넓이와 깊이, 그리고 방향

가난한선비/과학자 2017. 3. 28. 05:28

우리들이 믿는 바를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 전에는 우리도 우리들이 그 동안 무엇을 믿어왔는지 모르는 법이다. 우리들의 말하기와 글쓰기가 탐색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들에게는 말을 하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이 믿음을 확인하는 방법이 된다.


그 사람의 말과 글은 곧 그 사람이 믿는 바다. 그 믿음이 실천적인지 아닌지는 상관없다. 어쨌든 그것은 그 사람의 믿음이다.


겸허해질 수 밖에 없었던 인생의 한 점을 지나면서부터 다른 사람의 말과 글 (특히 글)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그 동안 마치 몇 년은 족히 굶은 것처럼 게걸스럽게 책들을 마구 먹어댔다. 나의 내면에 숨겨져 있었으나 그것이 내 것임을 뒤늦게 발견하게 되었을 때 오는 극심한 혼란과 충격에 그 상황의 원인과 답을 찾으려 했던 것은 내가 인간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답이란 항상 어떤 빛과 함께 오며 그 빛은 방향을 가지고 크기를 가진다. 그리고 그 빛에서부터 답을 찾은 경우, 그 사람은 그 빛의 방향과 크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회고하며 모든 현재와 미래까지도 걸게 된다. 나도 그랬다. 나에게도 희미했지만 빛이 비춰지기 시작했고 그 빛 가운데서 나름대로 답을 찾았다.


허다한 믿음의 선진들이 그랬듯, 나 역시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이 내 삶을 재조명해 주었다. 나는 비로소 실패한 것만 같은 내 삶에 용기를 가지고 재 방문할 수 있었으며, 그것에서 의미를 찾았다. 수렁에서 건져진 것만 같은 기분. 그것은 은혜였다. 나의 독서 방향이 기독교 신앙서적과 신학서적으로 정해진 건, 그러므로 전혀 놀라운 사실이 아니었다.


페이스북이란 21세기의 아고라 광장과도 같은 수단의 도움으로 정말 많은 믿음의 색깔을 맛보고 있다. 믿음의 선진들의 글을 읽으며 정말 많은 것을 배운다. 때론 너무 깊은 내용이라 이해하지 못할 때도 많고 때론 의외로 가벼운 내용이라 내가 너무 의미를 과도하게 부여하지 않았나 싶은 글들도 많다. 어쨌거나 그 글들은 그들의 믿음이다. 이러한 다양하고 다채로운 글들을 언제 어디서나 맘만 먹으면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 난 축복받은 자임이 틀림없다는 증거일 것이다.


'씀'은 '읽음'을 먹고 소화시켜 다시 내뱉는 행위다. 좋은 음식은 좋은 건강으로 이어지듯, 좋은 읽을 거리는 좋은 쓸 거리를 제공한다. 재료가 좋아야 하는 건 당연하겠지만, 소화시키는 능력 또한 중요하다. 그것은 훈련이다. 많이 읽어야 많이 쓸 수 있다고, 또 잘 읽어야 잘 쓸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단지 가벼운 일차함수의 선형적인 기울기값에만 모든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y절편의 초기값이 그 일차함수의 직선이 x축을 뚫고 비로소 양의 값으로 나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법이다. 소화하는 능력은 생각하는 시간이다. 묵상하는 시간이다. 내 것으로 만드는 시간이다. 새로운 뉴런의 시냅스가 만들어지는 시간인 것이다.


먹어 치우듯 읽는 방법은 깊이를 가지기엔 부적절함을 깨닫는다. 맛보기도 좋았고 또 진정 맛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새로운 갈증이 생겼다. 이젠 좀 더 깊이 들어가고 싶다. 속도를 늦추고, 효율을 버리고, 좀 더 무식해지는 방법이다. 결국은 내가 책을 빚는 것이 아니라, 책이 날 빚는 것이 아닌가!


견고한 믿음을 가지고 싶다. 내 글을 어쩌다가 읽는 사람들 (극소수겠지만)에게도 내 글은 내 믿음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믿음의 선진들에게 내가 받아누렸던 것처럼, 나도 할 수만 있다면 내 글을 읽는 한 명의 사람에게라도 (지금까진 어땠는진 모르겠지만) 좋은 영향을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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