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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faith

구원: 세상 탈출 후 천국으로 뿅~???

가난한선비/과학자 2017. 8. 4. 02:06

- 새 하늘과 새 땅의 의미를 되새기며, 톰 라이트를 읽다.


- 그의 저서를 두 권밖에 읽지 않은데다 신학적 배경지식이 허접한 관계로 내가 감히 톰 라이트를 평가할 순 없을 것 같다. 최근에 읽은 “이것이 복음이다” (톰 라이트 저, IVP 출판)를 읽고 밑줄 그은 부분 중 일부를 나누고 싶어 아래에다 옮기는 것으로 대신한다. 내가 느낀 톰 라이트의 목소리는 강하다. 하지만 강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깊다. 정통으로 타겟의 정중앙을 깊게 찔러 한방에 격퇴시키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톰 라이트를 통해서도 기독교에 깊게 들어와 꽈리를 틀고 있는 무속적이고 이교도적인 사상과 신앙이 퇴출되기를 기원한다.


1. 창조와 언약을 잊어버린 복음을 제시하는 것, 무고한 희생양의 피로만 진노가 풀리는 성난 신에 관한 복음을 제시하는 것, 창조의 회복과 완성 대신 이 세상은 내버려둔채 일부 사람 (‘영혼’)을 다른 곳, 말하자면 구름 위 천국으로 데려갈 준비를 하는 복음을 제시하는 것은 진정한 성경적 기독교라기보다는 복잡한 형태의 이교주의에 훨씬 가깝다.


2. 완성을 위한 창조주의 확고한 의지가 담긴 프로젝트가 아닌 우리가 탈출해야 할 감옥처럼 창조 질서를 취급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닌 특정 형태의 이교주의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에 대한 이야기를 중요하지 않은 부차적인 사안, 혹은 단순히 우리와는 무관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은 성경적 기독교가 아닌 거의 모든 형태의 이교주의다. 나아가 고약하고 성마른 신이 자신의 노여움을 누군가에게 풀어야겠다고 결심했고, 결국 그 노여움을 살 만한 일을 전혀 하지 않은 한 희생양에게 그것을 모두 퍼부었다는 식의 생각 역시 분명 이교주의다.


3-1. 현대의 많은 운동, 특히 근본주의는 18세기 합리주의에 존재하는 위험을 피하지 못했다. 그 위험이란 (1) 우리의 믿음에서 모든 부분을 딱 떨어지는 명확한 명제로 표현하려 하고, (2) 진정한 기독교란 명확하게 그런 명제를 믿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며, (3) 마지막으로 오직 그런 믿음만이 소위 ‘천국에 가는 길’을 보장하는 참되고 합당한 신앙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위험이다.


3-2. 한편 합리주의적 기독교 변증가가 “그래도 나는 증명할 수 있어!”라고 외칠 때, 낭만주의자는 “일단 믿어 봐. 그럼 이상하게 네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낄 수 있을 거야!”라고 속삭인다. 그리하여 경험과 느낌에 호소하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특히, 1세기에 일어난 세상을 바꾸어 놓은 유일무이한 사건이 중요하다는 인식보다 우리의 경험과 느낌을 더 우선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일부 지혜로운 낭만주의 사상가들도 인정하듯, 진정으로 삶을 변화시키는 경험은 그 경험이 다른 무언가의 우연한 부산물일 때 나온다. 감정 자체를 위해 자극하고 그런 감정을 신앙이라 부르면서 그 신앙이 영생에 이르는 열쇠라고 주장하는 것은 합리주의만큼이나 섣부른 캐리커처다.

3-3. 합리주의와 낭만주의의 공통적인 문제점은 사람들의 관심이 복음의 핵심 메시지에서 멀어지게 한다는 데 있다. 이 둘은 뿌리 (실제로 일어난 어떤 일, 그리고 그것에 관한 좋은 소식이 기독교의 핵심이라는 사실)는 없이 열매 (기독교의 합리성 혹은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에 대한 개인의 경험)만 얻으려 한다. 결국 합리주의와 낭만주의는 그것이 비기독교적인 형태로 끼친 영향뿐만 아니라 교회가 그것을 수용하게끔 했던 방식을 통해 교회의 많은 사람들을 좋은 소식의 핵심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좋은 소식은 단순히 “이것 보세요. 내가 이 추상적 진리를 증명할 수 있습니다” 혹은 “당신의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될 거에요”가 아니다. 좋은 소식은 바로 “성경대로 메시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고 사흘 만에 살아나셨습니다”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당신의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는 “따라서 당신은 이제 진정한 인간으로서 당신의 역할을 마음껏 수행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이제 이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당신의 구체적 소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로 이어져야 한다.


4-1. 다시 한 번 말한다. 기독교 복음의 궁극적 비전이 우리 앞에 드러내는 목적은 죽을 때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까지 포함해 사람들이 죽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놀랄 만큼 거의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적어도 그들이 죽은 바로 직후에 대해서는 말이다. ‘궁극적으로’ 일어날 일은 다른 얘기다. 성경, 특히 신약성경은 궁극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관심이 아주 많다. 바로 그것이 성경과 그 중심에 있는 좋은 소식이 창조세계 전체의 구원과 회복을 말하는 이유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이 마침내 창조 질서 전체를 변화시키고 그분의 임재와 영광이 흘러넘치게 하실 것이라면 (바로 이것이 우리가 받은 약속이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그때까지 우리가 어디에 있게 될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그런 새로운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인가다.


4-2. 성경의 마지막 장면 (계 21-22장)은 구원받은 영혼들이 하늘에 올라가는 것을 보여 주지 않는다. 그 장면이 드러내는 것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 하나가 된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되는 순간이다. 그것이 예수님이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시며, 아버지의 뜻을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이유다. 따라서 과거에 관한 좋은 소식이 예수님이 이전에 이루신 어떤 일과 관련이 있다면, 미래에 관한 좋은 소식은 그분이 다시 돌아오실 때 이루실 어떤 일과 관련이 있다. 그분은 온 세상을 변화시키고, 그곳을 자신의 공의와 기쁨과 사랑으로 가득 채우실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좋은 소식이다.


5. 또한 좋은 소식은 나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관한 것이다. 새 창조세계를 갈망할 때, 우리의 개인적 소망은 덤으로 주어진다. 거꾸로 모든 초점을 우리 자신의 개인적 소망에 맞출 때, 우리는 복음 전체를 왜곡하게 되며,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는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다른 왜곡들처럼 아주 오랫동안 우리에게 해를 끼칠 것이다.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자 온 세상의 적법한 주인이신 예수님이 왕의 자리에 오르심으로써 언약 갱신이 이루어짐에 따라 마침내 시작된 하나님의 새 창조세계에 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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