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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근주 교수님의 '구약으로 읽는 부활신앙'을 읽다가 잠시 책을 내려놓고 묵상하다가 떠오른 생각의 단편을 아래에 끄적임. 부활신앙을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연결시키는 해석은 매우 공감이 가고 아주 신선하다고 느껴짐.
마침내 완성될 하나님나라의 도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서 현실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그 사람이 초월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현실은 “이미 임한 하나님나라”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나라”의 중간 단계다. 여전히 죄와 악이 범람하는 세상이다. 우리는 그런 현실 가운데서 약속된 소망을 가지고 기다리는 존재인 것이다. 소망을 가졌다고 해서 현실의 모든 환란을 초월할 수 있다고 자칫 생각하는 사람들은 영과 육이 이원론적으로 구분되어 있거나 신앙과 삶이 동떨어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하나님나라는 “영”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신앙”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나라는 모든 곳에 임할 것이고 또 이미 임해 있다. 아마도 그런 플라톤적인 이원론적인 발상을 하는 사람들은 이해가 쉽진 않을 것이다. 그들이 정의하는 “하나님을 위한 삶” 혹은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은 철저하게 그들이 주일이라고 부르는 일요일날 “거룩하게” 치르는 교회 활동의 연장성에만 머물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삶의 현장이란 그들이 주일날 받은 “은혜”를 가지고 가까스로 견뎌내는 일상일 뿐이다. 즉, 그들에게 있어선 구원의 의미가 그저 죽은 이후 천국으로 쓩 구출받는 것을 의미하고 예수님의 부활도 그런 개인구원론을 뒷받침하는 근거일 뿐이다. 그들의 눈은 언제나 미래에 맞춰져 있다. 그들에게 현재는 지옥과도 같을 테니까.
그러나 부활신앙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하나님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더욱 신뢰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부활신앙은 미래의 소망을 가져다 주는 동시에 현재의 일상에서의 하나님나라를 누릴 수 있도록 해준다. 다시 말해 부활신앙은 미래 관점에서 보자면 “소망”이요, 현재 관점에서 보자면 “신뢰”로 번역될 수 있다. 이런 세계관을 가진 하나님백성들의 눈은 미래가 아닌 현재에 더 초점을 둔다. 소망이란 공중에 붕 뜬 채 언제가 오실 예수님을 무작정 기다리는 마음이 아니다. 현재를 인정하며 그 가운데서도 악을 선으로 이기며 여호와의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행위의 근거가 된다. 미래의 소망은 현재의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소망은 한낮 공허한 약속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현재 살아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행동으로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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