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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화해했다. 아, 천국 같다.
남편과 아빠와 가장의 자리라는 게 딱히 정해져 있을까 싶지만, 우린 잠재의식과 무의식 속에 내재된, 출처가 불분명한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아내와 오고 나서의 한 달은 내게 그 암묵적인 기준을 여실히 알게 해주었다. 3년 만에 다시 합친 우리는 끝내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야 말았다.
생각해 보면 다분히 감정적인 이유로 필요 이상으로 증폭된 싸움이었지만, 그 시작을 찬찬히 뜯어보니, 그것은 한 마디로 '자리 잡기' 내지는 '역할 재분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난 3년 간도 난 쭉 남편이었고 아빠였다. 그러나 명찰만 반듯했을 뿐, 반쪽짜리 남편에 반쪽짜리 아빠였던 것이다. 남편이야 아내가 없으면 그 의미가 사라진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지만, 아빠 역시 엄마가 존재할 때만 온전한 역할이 가능하다는 것을 그 동안 나도 모르게 놓쳐왔던 것 같다. 난 오히려 아빠 역할은 물론, 다는 아니더라도 엄마 역할까지 해왔다는 식으로 생각해 온 측면이 컸다. 아빠 역할만은 100% 이상으로 해왔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이번 싸움으로 인해 그것이 틀렸다는 게 확인이 됐다. 난 아빠 역할도 엄마 역할도 본의 아니게 제대로 해오지 못했던 것이다.
낯설었지만 3년이란 시간은 익숙해지기에 충분했고, 난 그 버거운 환경을 견디고 극복해 내느라 어느 것이 참된 아빠와 엄마의 역할인지 분별할 여유가 없었다. 3년 내내, 아무리 노력해도 채워지지 않고 채울 수도 없는 엄마의 자리를 뼈 속 깊이 체감하기는 했지만, 아빠의 자리에 대해선 자신만만했었다. 그러나 의외로 문제는 거기서 터졌다.
엄마의 부재 속에 아빠 혼자서 아이를 키운다는 건, 그것도 타지인 미국이란 곳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짤리지 않고 일하면서 친척도 없이 혼자서 육아를 감당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 함정이 있었다. 그 어려운 일을 해내느라 난 나도 모르게 나의 왕국을 건설했었던 것이다. 엄마와 아빠의 대화 없이 나 혼자서 모든 결정을 내렸고, 비록 그 결정이 내 유익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내가 손해 볼 결정은 하지 않았었다. 누구나 내 상황을 보면 대단하다든지 응원한다든지 해서 이해해 주려는 입장이었기에 명분은 충분했다. 그러나 그 객관적인 명분 뒤에 숨은, 혼자 내리는 결정과 대화 없는 독단, 난 이것들에 나름 편리함을 느끼기 시작했고 끝내 그것에 만족해왔던 것이다. 그야말로 나의 왕국이었던 것이다.
아내가 오고 문제가 생긴 건 결국 그 동안 유지되어 온 나의 왕국이 깨어지는 시기였다. 그것은 깨져야만 했다. 그러나, 낯설지만 그 시스템에 익숙해져 버렸고 길들여져 버린 나로선 그것이 깨어지는 것이 내심 탐탁치 않았던 것이다.
아내는 '언어 폭력'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나의 왕국은 아내에게 '언어 폭력'이라는 모습으로 다가갔던 것이다.
묵상하고 기도했다. 여러 가지 책도 읽었다. 침묵 가운데 들어갔다. 답을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었다. 명확했다. 내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서로가 도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새롭게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결혼한 지 13년째이지만, 이제 신혼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고 했다. 서로를 배려하며 다름을 인정하고, 진정으로 함께 하며 진정으로 돕는 배필이 되자고 했다.
어제, 아내가 온 지 한 달째. 아내가 진짜로 내게 온 날이다. 우린 함께다. 함께 간다. 이제 본격적인 결혼 생활의 시작이다.
(3년만에 다시 합쳤다고 마냥 해피해피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싱글이거나 결혼 초짜이거나 이별과 재회를 해 본 적이 없거나 아니면 영혼 없는 인사말을 하신 분들임. 참고로 김** 선교사님은 날 만나자마자 첫 질문으로 곧바로 우리 현재의 관계를 정확히 캐치하셨음. 역시!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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